哲學이야기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별관신사 2019. 12. 11. 16:31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마음씀은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의 3계기로 구성된다. 따라서 죽음이 두드러진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의 의미도 3계기에 근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의 밑그림을 얻게 될 것이다.

첫째, 죽음은 그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줄어든 최후의 미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현존재의 존재유무를 가늠하는 가장 두드러진 의미에서의 다급함이다. 즉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현존재가 죽음을 이처럼 두드러진 다급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현존재가, 성숙을 기다리는 과일과는 달리, 언제나 이미 자기를 앞질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앞지름' 이라는 마음씀의 구조계기(즉 실존성)를 근거로 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더욱 명료해지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말하자면, 마음씀의 이 구조계기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구체화된다.

둘째, 죽음은 마음씀의 두 번째 구조계기인 피투적 현사실성과도 관련된다. 현존재가 자기를 앞질러 죽음을 문제삼을 수 있는 까닭은 현존재가 이미 죽음의 가능성 가운데로 던져져(피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에로의 피투성이 현존재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절실하게 노정되는 것은 불안이란 근본 정상성()에서이다.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기에 불안거리는 물론, 불안의 이유도 단적으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 가능이다.

셋째, 마음씀의 세 번째 구조계기는 퇴락이다. 일상적 현존재는 우선 대개는 자신이 배려하는 >세계<에 몰입한다. 그러기에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가져오는 '으스스함'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일상적 현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씀의 세 구조 계기인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이 죽음의 존재론적 실존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죽음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에서 보자면, 마음씀에 근거한다.

[읽기자료]
미제, 종말 및 전체성에 관한 고찰이 초래한 결과로 분명해진 것은, 죽음의 현상을 '종말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근본 틀로부터 해석해야 한다는 필연성이었다. 그렇게 해서만 '종말에 이르는 존재'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 존재라는 것이 어느 만큼 현존재 자신에 있어서 가능한가 하는 것이 그 존재구조에 따라 명료해질 수 있다. 현존재의 근본 틀은 마음씀이라고 밝혀졌다.

이 말[마음씀]의 존재론적 의의를 정의로 표현하면,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있음으로써 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 내에-있음'이다. 이것으로 현존재의 존재의 기초적 성격들이 표현되었다. 즉, '자기를 앞지름'에서는 실존이, '이미 …에 있음'에서는 현사실성이, '…에 몰입해 있음'에서는 퇴락이 표현되어 있다. 죽음이 두드러진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또는 종말에 이르는 존재)은 이들 성격을 근거로 해서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249-250, 356)

죽음은 그 때마다 현존재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존재 가능성이다. 현존재 자신은 죽음과 함께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에게 다급하게 다가선다. 이 가능성에 있어서 현존재에게는 자신의 세계-내-존재가 단적으로 중대하게 문제된다. 현존재의 죽음은 '더 이상 현존재일 수 없다'는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이런 가능성으로서 자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설 때, 현존재는 완전히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지시받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설 때, 그에게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교섭이 단절된다.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이 가능성은 동시에 가장 극단적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존재 가능으로서 죽음의 가능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죽음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드러난다. 그런 가능성으로서 죽음은 하나의 두드러진 다급함이다. 다급함의 실존론적 가능성의 근거는,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다는 데, 더욱이 '자기를 앞지른다'는 방식으로 개시되어 있다는 데 있다. 마음씀의 이 구조계기['자기를 앞지름']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구체화된다. '종말에 이르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더욱 명료해지는 것은 현존재자가 위와 같이 성격지워진 두드러진 가능성을 향한 존재일 때이다.(250-251, 357-358)

그러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현존재가 자기 존재의 경과 중에 추후적으로 또 수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현존재가 실존할 때, 현존재는 이미 이 가능성 가운데 던져져 있는 것이다. 현존재가 자기의 죽음에 맡겨져 있고 따라서 죽음이 세계-내-존재에 속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 현존재는 우선 대개 명시적으로 더구나 이론적으로 알지 못한다. 죽음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이 현존재에게 더 근원적이고 더 절실하게 노정되는 것은, 불안의 정상성[]에서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에 직면한 불안이다. 불안거리[불안의 대상]는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의 이유는 단적으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종명()에 대한 두려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의 자의적이고 우연한 나약한 기분이 아니라 현존재의 근본 정상성이며, 현존재가 자기의 종말을 향해 던져진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데 대한 개시성이다. 이로써 사망의 실존론적 개념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죽음은 [전재자의] 순수한 소멸과도, 또 [생물의] 단순한 끝장과도, 끝으로 [생물로서의 인간의] 종명의 체험과도 엄격하게 구별된다.(251, 358)

'종말에 이르는 존재'란 이따끔 떠오르는 어떤 소회()에 의해 또 그런 소회로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피투성에 속하는 것이고, 이 피투성은 (기분의) 정상성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드러난다. (…) 현사실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 대개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을 구실로 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보편적으로 현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존재가 우선 대개 직면한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여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는 현사실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우선 대개는 퇴락의 방식으로 죽는다.

왜냐 하면 현사실적 실존은, 일반적으로 또 무차별적으로 피투적 세계-내-존재-가능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배려되는 세계 속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에 몰입하여 퇴락하는 존재'에서 고지되는 것은 '으스스함'으로부터의 도피, 다시 말하면 이 경우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로부터의 도피이다. 실존, 현사실성, 퇴락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성격규정이고, 따라서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한다. 사망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의 점에서는 마음씀에 근거한다.(251-252, 358-359)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이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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