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지상생활의 고통을 설명하기 어려움은, 무엇보다 확실히

별관신사 2014. 3. 23. 06:12

지상생활의 고통을 설명하기 어려움은, 무엇보다 확실히
인간에 대해서 그의 생활이 출생에서 시작되어 죽음으로
끝나는 개인생활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두렵고, 목적이 없는 고통, 인간이 부딪히는
그 무엇으로써도 변명할 도리 없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은, 그저 그것

만으로서도 인생으로 돌린 모든 합리적 의의를 파괴해 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선량한 일, 분명 남을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병마(病魔)가 나를 습격해서 나의 과업을 훼방(毁謗)하고, 아무런
뜻도 까닭도 없이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군다. 기차 선로의 나사못이
녹슬어 빠져나간 바로 그날에, 그 기차의 그 차칸에 하필 선량한 어미니인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 눈 앞에서 그녀의 자식이 깔려 죽는다. 마치
리스본이나 베르니가 서 있던 그 장소가 지진 때문에 무너져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산 매장되고, 무서운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이러한 일은 도대체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고통에 찬 이러한 아무 뜻도 없는 무참한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론적인 설명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일체
현상의 이론적 설명은 항상 문제의 핵심(核心)을 벗어나 그저 그
불가해함을 명시할 따름이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어떤 병균이 내게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미니 눈 앞에서 깔려 죽은 것은 습기가
이러쿵저러쿵 쇠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베르니가 무너진 것은 이러이러한
지질학상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러한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운 고통을 받고, 나는 그러한 참변을 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없다. 그 뿐더러 이성은 내게 대해서 한 사람이

그런 사건에 부딪히고, 다른 사람은 부딪히지 않는다는 법칙은 있지도
않고, 또 결코 있을 리도 없다는 것, 그러한 사건은 참으로 수 없이
많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나의 생명은

순간순간에, 가장 두려운 고통의 수 없는 사건에 폭로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만약 자기의 생활을 개인적 존재로서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론만을 끄집어낸다고 하면, 그들은
한시라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비유(比喩)적으로 말해서 만약
주인이 머슴을 쓸 때 그 머슴을 산채로 모닥불에 태운다든가 산채로

껍질을 벗긴다든가, 근육을 잡아 늘인다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몸서리치는 일, 그가 쓸려고 하는 사나이 눈 앞에서 아무런 까닭도 원인도
없이 다른 머슴들에게 해 보이던 무서운 일을 마음내키는 대로 언제라도

행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면, 어떠한 머슴도 아마 그러한 주인에게
고용(雇用)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실제로 이 인생을
그들이 하고 있는 것 같이 인생을 해석하고 있다면 항상 신변에서 보고,

그리고 자기도 언제 그 속으로 떨어질는지도 모르는 그 무엇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에 대한 공포 만으로서도, 그 중의
한 사람도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와 같은 참혹하고
무의미한 고통에 가득찬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여러 쉬운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고 있다. 고통을 탓하고 투덜대면서도

언제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이 생활에 고통보다는 열락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단순히 추론(推論)뿐만 아니라, 인생의 철학적

연구는 지상의 모든 생활이 열락에 의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고통의
연속임을 분명히 증명해 조고 있으며, 둘째로는 우리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 의해서나 남에 의해서 죽음을 때까지 가벼워질 가능성이 없는

쉴새없이 더해가는 고통의 연속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하지 않고, 삶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괴(奇怪)한 모순의 설명은 오직 하나다. 인간은 모두 그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모든 고통이 그들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항상 필요하고
불가결인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예견(豫見)하거나, 그런 쓰라린 꼴을 당하면서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고통에 반항하는 것은, 그저 자기 일신을 위한
행복을 요구하는 그릇된 인생관에 비추어 보고 뚜렷한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이 행복의 파괴가 무엇인지, 일종의 불가해하고, 따라서 심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 같이 해서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몸을 떨고, 무엇인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부딪히거나 한 것처럼 그것에 몹시 놀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모두 고통에 의해서 키워지고, 그의 전 생애는 그 자신이
경험하고, 그 자신이 다른 존재 위에 가하는 고통의 연속이므로 지금은

어지간히 고통에 길들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통이 있을까 라고들 자문(自問)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이
생각된다. 모든 인간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의 열락이란 열락을 모두

다른 존재의 고통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그의 모든 고통은 그의 열락을
위해서 불가결하다는 것, 고통 없이는 열락도 없다는 것, 고통과 열락은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서 생기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를 위해서

필요한 두 개의 상반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면 고통은
웬 까닭이고, 무엇 때문인가? 라고 이성 있는 인간이 스스로 묻는 문제는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통이 열락과 얽매여져 있음을 아는

인간이 왜, 고통은 웬 까닭이고, 무엇 때문인가? 라고는 자문하나, 열락은
웬 까닭이며, 열락 무엇 때문인가? 라고는 자문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 생활은 모조리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의 활동은 모조리 오직 고통에 의해서만이
일어난다. 고통은 활동을 일으키는 병적 감각이며, 그리고 이 활동이 그
병적 감각을 구축(驅逐)하고 열락의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생활은 비단 고통에 의해서 손상될
뿐더러, 오직 고통에 의해서만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인생을
움직이는 본체이며, 그로 말미암아 있어야 할 것인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고통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은 대관절 무엇을
묻는 것일까? 동물은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
농어가 배가 고파서 잉어를 괴롭히고, 거미가 파리를 괴롭히고, 늑대가

양을 괴롭힐 때, 그들은 자기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농어나, 거미나, 늑대도, 그들보다 강한 자로부터 그와
같은 고통을 받을 때에는 도망치거나, 반항하거나, 몸부림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기들에게 닥치는
것이 당연히 닥칠 것이라는 점에는 조금도 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남의 다리를 벤 싸움터에서 다리를 잘리었을 때, 그 치료에

장신없는 인간, 독방에 갇혔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잘
보내기에만 정신을 팔면서도 그 뒤에는 그 자신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거기에 사람을 가두는 인간, 그를 잡아 찢으려는 늑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에만 정신이 없으면서도 후에는 자기 자신이 수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서
그것을 먹는 인간, 이러한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시인할 수가 없다. 그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라고 시인할 수 없음은, 그러한 고통에
부딪히면서도 그때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날 일이

아닌 것이 일어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늑대에게 잡혀 먹히려고 하는 인간이 할 일은 늑대로부터
벗어나서 도망치는 일 밖에 무엇이 있을까?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참회하고,
진리를 아는 일이다.
동물은 그저 현재에 있어서만 고통을 받는 것이므로, 따라서 동물의

고통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활동은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 지향되어,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단 현재에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미래에서도 괴로워할 것이므로, 인간의 고통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활동이, 만약 그저 동물적 인간의 현재에만 지향될 때에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저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도 지향되고, 과거와
미래에도 지향되는 활동만이 괴로워하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동물은 갇히면 우리에서 도망치려고 애쓴다. 또 다리를 다치면 그 아픈
데를 핥는다. 또 다른 짐승에게 먹힐상 싶으면 날뛰고 도망친다. 그의
생활의 법칙은 외부로부터 파괴되는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활동을 그

회복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 하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 자신이나 나의 가까운 사람이 감옥에 유폐(幽閉)되거나,
싸움터에서 다리를 잃거나, 혹은 늑대가 그를 위협할 때에는,

감옥으로부터 도망하거나, 다리의 치료나, 늑대로부터 도망치는 일로
지향되는 활동이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감옥의 유폐,
다리의 아픔, 늑대의 습격 등은 그저 나의 고통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 속에서,
나나 다른 사람들의 미오(迷誤)속에서 본다. 그래서 만약 나의 활동이
고통의 원인인 미오에 지향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내가 그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고통이 있을 리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도 삶의 가능을 빼앗아갈 정도의 무서운 양으로까지

증대되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고통의 원인은 동물생활의 법칙의 파괴다. 이 파괴는
고통의 의식으로서 표시되는 것이며, 법칙의 파괴에 의해서
환기(換起)되는 활동은 고통의 제거(除去)로 지향된다. 합리적

의식으로서의 고통의 원인은, 합리적 의식의 생활법칙의 파괴다. 그리고
동물의 고통이 아픔으로 지향되는 활동을 환기시키고, 이 활동이 그
고통의 아픔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존재의 고통도 미오로

지향되는 활동을 환기시키고, 이 활동이 그 고통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왜? 라든가 무엇 때문에? 라고 하는 고통의 경험 내지 상상에 즈음해서,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의문은 그저 인간이 고통에 의해서 자기 내부에
환기되어야 할 활동, 그 고통의 아픔을 제거해주는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지시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실제 자기의 생활을 동물적 생존에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통을 제거하는 활동은 있을 수 없다.
그가 자기의 생활을 이해하는 일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적어지는 것이다.

개인적 생존은 인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개인적 미오 속에서
개인적 고통의 원인을 찾아볼 때, 즉 그가 병들게 된 것은 독이 있는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어맞은 것은 그가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굶주리고 헐벗은 것은 일하기 싫어했기 때문임을 이해할 때에,
그는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이 해서는 안될 일을 했기 때문임을 알고,
앞으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활동을 미오 제거의

방향으로 지향하면서, 고통에 반항하는 일이 없이 마음 편히 때로는
기꺼이 그것을 견디어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보이는 고통과 미오의
연계(連繫)의 한도를 넘는 고통이 이러한 사람에게 닥칠 때, 즉 그가 항상

개인적 활동밖에 있는 원인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또 그의 고통의
결과가 그에게도 또 다른 자아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때, 그러한
때면, 그는 자기가 있어서는 안될 것에 물리우는 것 같은 느낌이 나서

급기야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라고. 그리고
자기의 활동을 지향할 수 있을 목표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무의식적으로
고통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어서, 결과가―때로는 그 둘다모두가―그로부터

공간 내지 시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많다. 즉 그 고통이 무서운
괴로움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고통의 대부분은 늘 그 원인과
유전적 질병, 불행한 우연, 흉작(凶作), 철도사고, 화재, 지진 등등

죽음으로 끝나는 따위의 것이다.
자손에게, 몹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 정열에, 몸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는 교훈을 장래의 인류에게 주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설명이나 혹은 기차의 구조를 개량해야 한다는 것이라든가, 불의
취급을 조심해야 한다든다 하는 설명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나는 남들이 이야기 해주는 설명에 나의 생활의 의의를 인정할

수는 없다. 나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나로서의 희구를 가지는 나의
생활이고, 남의 생활을 위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은 그저
이야기 재료에 적합할 따름이고, 나를 위협해서 생활의 가능성을 빼앗는

고통의 무의미에 대한 이 공포를 덜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되는 데까지 어떻게 해서 내가 나의 미오로써 남을
괴롭히고, 나도 남의 미오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또 만약 일체의 고통은 사람들에 의해서, 어쨌든 이
생활 속에서 고쳐져야 할 미오에 대한 지시임을 그와 마찬가지로
간접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직도 그 무엇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큰 열(列)이 남아있는 것이다. 숲속에서 늑대
떼가 어떤 사나이를 물어뜯는다. 어떤 사나이는 물에 빠져 죽든가, 얼어
죽든가, 불타 죽든가, 단순히 쓸쓸하게 병에 걸려서 죽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느 때가 되든지 간에 그가 어떻게 괴로워했는지 알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
누구에게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자기의 생활을 동물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에게 있어서 고통과 미오의
연쇄(連鎖)는 그저 그에게 보이는 현상 속에 있을 따름인데, 그 임종의

고통에 있어서의 이 연쇄는 이미 완전히 그의 심적 시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경험한 고통과 자기의 생활 사이에

연쇄를 시인하지 않고, 자기 고통의 대부분을 아무런 뜻도 없는
고통으로서 견디어 나가든다, 혹은 우리들의 미오와 그 결과인 행위가
결국 어떠한 것이라 한들, 우리들의 죄가 어떠한 것이든지, 그 고통의

원인임을 인정하고 그 결과 우리들의 고통은 그것이 비록 어떠한 것이든
간에 우리들과 남들의 죄의 구원이며 속죄(贖罪)임을 인정하든가 하는 이
두 가지다. 고통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 관계만이 가능하다. 하나는
고통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외적 의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은 당연히 올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참된 생활에 대한 고통인 내적 의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태도, 그것이다. 첫째 것은, 나의 독립된 개인 생활의

행복의 행복으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둘째 것은, 다른 사람들 및
그들의 존재가 행복과는 끊을 수 없는 결함 속에 있는 과거 및 미래의
나의 전 생활의 행복을 행복으로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첫째번 견해에

의하면, 고통은 아무런 설명도 없고 또 쉴새없이 증대할 뿐이고, 그
무엇으로써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과 독념(毒念)이외에는 아무런 활동도
환기시키지 않는 것이다. 둘째번 견해에 의하면, 고통은 참된 생활의

운동마저도 구성하는 활동 그 자체적 죄의식, 미오에서의 해방,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을 불러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성이 없다고 한다면, 고통의 괴로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활은 그의 개성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의 개성은 그의 생활 중에서 눈에 보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의 개성 중에서 그에게 보이는 원인과 행동과의 외적

결함은, 인간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항상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원인과
행동과의 내적 결함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좋든 싫든 인식시키는
것이다.

동물에게 공간적 및 시간적 조건 속에서만 보이는 미오와 고통의
연결은, 인간에게는 그러한 조건 외에도 그의 의식 내에서 항상 명료하다.
설사 어떠한 고통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항상 그것을 어떠한 죄든

자기의 죄의 결과로서 인정하고, 그리고 자기의 죄의 미오를 고통에서의
해방, 행복의 달성으로 인정한다.
인간의 모든 생활은 어린이의 첫날부터 고통을 통한 죄의 의식과

미오로부터의 자기 해방 속에서만 형성된다. 나는 진리의 어떤 지식을
가지고 이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것이며, 나의 내부에 있는 미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많았다는 것과 내가 미오에서

해방되면 될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적고 내가 달성한 행복이
많았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이 세계에서 가져가버리는 진리의
지식, 설령 나의 최후에 임종의 고통이 주어져도 좋다. 그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달성할 행복도 크리라함을 알고 있다.
고통의 고달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저 자기를 세계의 생활로부터
떼어서 세계에 고통을 가져온 자기의 죄를 인정치 않고, 자기를 죄 없는

자로 생각하는 탓으로 자기가 세계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반항의 기분을 가지고 있는 자 뿐이다.
그리고 놀라운 일로서는 심적으로 이성에게 분명한 일, 그런 일은

인생의 유일하고 참된 활동인 사랑에 있어서도 확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말한다. 자기들의 죄와 고통과, 세계의 죄와 고통과의 연결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은 고통의 괴로움에서 해방된다고, 사랑은 사실에

있어서 그것을 확증하고 있다.
모든 인간 생활의 반은 고통 속에서 지나간다. 그 고통을 그는
괴로움으로 인정치 않을 뿐더러 엄두에도 두지 않고,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그것이 미오의 결과로서, 또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해 주는 수단으로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인간은 고통의 고달픔을 많이 받고,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의 고달픔을 덜 받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 속에만
모든 활동이 나타나 있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합리적 생활은 모든
고통의 가능성을 물리친다. 고통의 고달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조상에

대한, 자손에 대한 동시대인에 대한 사랑, 인간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을
결합시키는 사랑의 연쇄를 끊으려고 해 볼 때에만 맛보는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