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육체의 고통은 사람들의 생활 및 행복의 불가결한 조건을 구성한다.

별관신사 2014. 3. 24. 06:23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아프다. 육체적으로 아프다. 이 아픔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라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필요할 뿐더러, 아픔이 없다면 우리들은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픈 짓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아픔을 적게 하고 그 아픔에서 생기는
행복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해준 사랑이다.

우리들이 가지는 아픔의 최초의 감각이 우리들의 육체를 보존하고, 그
동물적 생활을 계속해 나가기에 첫째이며 중대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아픔이 없다면, 우리들은 모두 어린아이었을 때 심심풀이로

자기의 육체를 아주 태워버리거나, 칼로 베어버렸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어느 누가 있을까? 육체의 아픔이야말로 동물아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아이들에게 흔히 보듯이, 아픔이 자아의 보호로서 소용될 수

있는 동안 이 아픔은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충분히 발달되어 우리들의
고통이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그것에 반항할 때쯤
되어서 아픔을 느끼는 정도로 무서운 고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픔은

동물과 어린 아기에 있어서는 극히 한정적인 소규모적인 것이어서, 결코
합리적 의식의 부여(賦與)된 생물 속에 다달은 만큼의 고통의 정도에까지
미치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린 아기에 있어서 벼룩에

약간 쏘이기만 해도, 때로는 내장기관을 파괴당하는 아픔에서 오는 것처럼
모질게 울부짖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성이 없는 생물의 아픔은 그
기억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누구라도 어릴 때의 아픔의 고통을

상기해 보라. 그는 자기 내부에 그것에 관한 기억이 조금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상상 속으로 상기할 힘조차 없음을 알 것이다. 어린 아기나
동물의 고통을 목격하여 우리들이 받는 인상은, 그들의 고통보다 오히려

우리들이 더 고통스럽다. 이성을 갖지 못한 생물의 외적 표정은, 항상
고통 그것보다는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크므로, 우리들의 동정을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크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마치 뇌병 열병

장질부사 기타 모든 고민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이 아직 깨우쳐 지지 않고, 아픔이 그저 자아의 보호로서만
소용되는 시절에 있어서 고통은 그렇게 고달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합리적 의식의 가능이 생긴 시절에 있어서의 아픔은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키는 수단이고, 이 의식의 깨우침 정도에 준해서 고통이
점점 고통으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합리적 의식을 완전히 소유하게 됨에 이르러 비로소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저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활이 시작되고, 우리들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생활

생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 있어서의 아픔의 감각은
최대량으로 신장(伸張)될 수도 있고, 최소량으로 축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생리학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감수성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다는 것, 아픔이 그 한도까지 세게 되면 감각이 정지되든가,
실신(失神) 무지각 발열(發熱) 혹은 죽음이 닥쳐 오든가 함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그러므로 고통의 증가는 극히 정확한 한정량(限定量)을 가지고

있어서 그 한계 이상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아픔의 감각은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에 의해서 무한히 증대할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무한히 축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인간이 항상 아픔에 따르고, 그것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아픔을 무감각의 상태로까지 견디어 나가는 일에
기쁨을 느끼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순교자(殉敎者)는

말할 것도 없고, 불기둥(火主)위에서 노래 부른 훗쓰는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자기의 용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소리도 안내고,
떨지도 않고,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는 수술을 견디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픔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으나, 그 감각의 축소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아픔의 고통은, 그의 생활을 육체적 생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일이다. 고통의 고달픔을 없애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의 힘이, 반대로 그저 고통을 증대시키는 일에만
지향되어 있을 때 어찌 그것이 두렵지 않을 수 있으랴?

신은 태초에 인간의 수명을 70 년으로 정했으나, 후에 그것이 인간을
위해서 좋지 못함을 인정하여 현재처럼 고쳤다. 즉 인간이 그
사기(死期)를 알지 못하도록 정했다는 신화가 플라톤에게 있듯이, 인간은

처음에 아픔의 감각 없이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처럼 고쳤다는 신화가 있다는 사실의 합리성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 신들이 인간을 고통의 감각 없이 창조하셨다면, 인간은 즉시
그것이 있도록 해달라고 원했을 것이다. 만약 출산의 고통이 없다면,
여자는 자식을 그 자식이 하나도 살아 남지 않을 것 같은 조건하에서 낳을

것이다. 어린 아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육체를 손상(損傷)하고,
어른은 과거에 살고 있던 남이나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미오는 말할
것도 없이, 주로 자기들의 미오조차 영구히 알지 못했을 것이고, 이

인생에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며, 활동의
합리적 목적을 가지지도 못하고, 목전(目前)에 다가오는 육체의 죽음에
관해서의 관념과 융화할 수도 없으며, 사랑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자기의 개성의 종속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아픔은 다만 악이 아닐 뿐이고 그의 동물적 생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생활에 있어서도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다.

만약 아픔이 없다면 동물아는 자기의 법칙 위반에 대한 적당한 지시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만약 합리적 의식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진리를 모르고 자기의 법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박자(反駁者)가 있어서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의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지만, 남의 고통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통을 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고통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들은 다소 농담조로 물을 것이다.
남의 고통? 즉 제군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찌기 그친 일도
없으며, 또 현재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 및 세계는 현재

괴로워하고 있으며, 일찌기 괴로움을 그쳐본 일도 없다. 대관절 우리들은
오늘 비로소 이것을 안 것일까? 상이(傷痍), 불구(不具), 기아(饑餓),
감기, 질병 기타 여러 가지 불행한 우연, 특히 그것 없이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출산(出産)―이러한 것은 모두 생존상
불가결한 요건이 아닌가? 그리고 이 한가지 일, 즉 그것을 감소시키고,
그것을 구조하는 일, 이 일이야말로 인간들의 합리적 생활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생의 참된 활동은 실로 이 한가지 일로
지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개성의 고통과 인간 미오의 원인에 대한
이해 및 그것을 적게 하기 위한 활동, 이 일이야말로 인생과업의

일체(一切)다. 만일 내가 인간이며 개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개성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왜 나는 합리적 의식인가? 라고
묻는다면, 각 개인의 고통 속에서 고통 즉 미오의 일반적 원인을 보고,

자기와 남의 내부의 그것을 절멸시키기 위해서이다. 왜 그의 과업의
재료가 노동자에게는 고통으로 될 수 있는가? 마치 농부가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자기의 고통이라고 함과 마찬가지다. 경작되지 않은 토지가

고통이 되는 것은, 경작된 논밭을 보기는 좋아하면서도 그 논밭을 가는
일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농부들에게 한해서만인 것이다.
괴로워하는 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람의 봉사와 고통, 미오의 일반적

원인 제거에 지향된 활동은 인간 앞에 서 있는 오직 하나의 기쁜
과업이고, 그의 생활의 구성 요소인 불멸의 행복을 그에게 주는 유일한
일이다.

고통은 인간에게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좋든 싫든, 그에게는 유일한 행복이 있는 생활에 몸을
바치게 하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자기와 전 세계의 죄악과 자기와 전

세계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진리를,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실현해야 할 가능성(可能性), 아니 의무성(義務性)과의 사이에 생기는
모순의 의식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것은 세계의 죄에 참여하고 자기의

죄를 보지 않도록 하며 나의 생활 및 세계 생활의 모든 진리를 실현할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무성을 믿지
않도록해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첫째 것은, 그저 나의 고통을 더 할

따름이고, 둘째 것은, 내게서 사는 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것은 그저 인간에게 의식되어 있는 목적과, 개인 생활과의
불균등을 절멸시키는 참된 생활의 의식과 활동뿐이다.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은 그의 생활이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개인 생활에 의해서
제한되어 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시인(是認)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게 의식된 목적은 도달될 수 있는 목적이라는 것, 그것에 대한 노력

속에서 자기의 것을 더욱더 크게 의식되는 일에 자기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에 있어서 일체의 진리를 더욱더 크게 실현하는 일에, 전 세계의
생활과 끊을 수 없는 그의 생활의 과업이 현재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에도

이루어졌고, 장래에도 항상 이루어질 것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합리적 의식이 아닐진대, 자기 생활의 의미에 관한 미오로부터
흘러나온 고통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인간을 몰아서 인생의 유일한

참된 길, 즉 장해도 없고, 악도 없는 오직 하나의 길, 그 무엇에도
손상되지 않고, 처음도 끝도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행복만이 있는 참된 길로 몰아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