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지식과 진통

별관신사 2014. 5. 15. 02:20

여러분 중에, 어제 오후의 무지개를 본 분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군요. 무지개가 물 위에 떠
있더군요. 우리는 뜻밖의 순간에 무지개를 만났습니다. 무지개는 보기에 참 아름다왔습니다.
우리에게 참 즐겁다는 느낌과, 땅이 참 넓고도 아름답다는 자각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런
기쁨을 남에게 전하려면 말에 대한 지식, 정확한 말의 리듬과 아름다움을 알고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느낌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을 깊이 인식하는 상태와 더불어 오는
환희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지식이나 기억의 계발만을 통해서는 일깨워지지 않는 정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서로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을 계발하려면 기억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없이는
비행기도 날릴 수 없고, 다리도 만들 수 없고, 아름다운 집도 지을 수 없습니다. 길도 닦을 수
없고, 나무나 동물을 돌볼 수도 없으며 문명인이 마땅히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전기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과학을 응용하기 위해서는, 의약품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는 -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와 기억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최상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1급에 해당하는 선생님

밑에서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선생님들로부터 제대로 정보를 전수받을 수있고, 여러 분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수준에서는 필요한 것인 반면에 다른 수준에서는 장애가 되는

수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이 세상에는, 물리적 삶에 필요한 지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이런 지식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그런 지식을 습득하고, 인류의 복지를 위해 이용하는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데 장애가 되는 심적

차원의 지식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지식이라는 것은 전통 유산의 한 형태지요? 이 전통이라는
것은 기억을 계발하는 일에 다름아닙니다. 유물적인 일에 관한 한 전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통이 인간의 내면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될 때는 위대한 세계에의 발견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유물적인 사상과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지식과 기억에 기댑니다.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자동차도 몰 수 없습니다. 그 밖의 수많은 일에도 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우리의

마음, 정신, 내면적인 존재를 인도하는 전통 및 신앙이 될 때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힌두교도, 회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등등이라는 무리로 나뉘어져 있다는 걸 아시지요? 무엇이 이들을 갈라놓았을까요?

과학 연구나, 농업에 관한 지식이나, 다리는 어떻게 놓고, 제트기는 어떻게 날린다는 지식이 그런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갈라놓은 것은 마음의 작용을 일정한 틀에다 집어넣는 전통이며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우리들의 마음을 특정한 틀에다 맞추고 길들일 때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럴
때의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사람들 사이에다 적의의 장막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진리, 삶, 신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마음은

모든 전통, 모든 퇴적물, 마음이 심리적 방패물로 이용하는 모든 지식에서 자유로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육의 기능은 학생들에게 인간이 관심하는 갖가지 분야의 지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마음을 모든 전통에서 자유롭게 하며, 혼자 탐구하고 찾아내고 발견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해주지 않으면 학생들의 마음은 기계화되고 지식의 작용에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전통의 퇴적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없으면 영원한

가치인 궁극적인 존재를 찾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필요로 하고 생산해야 하는 것들을다룰 수 있으려면 나날이 늘어가는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래서 기억을 계발한다는 의미의 차원에서 지식은 유용하고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차원에서는 바로 이 지식이 유해한 것으로 작용합니다.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 다시 말해서지식이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할 경우 지식을 믿지 말아야 하고, 지식이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할때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데서 지성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갖가지 지식을 전수받아 왔겠지요? 대학에 가면,
기술자, 의사, 혹은 변호사도 될 수 있습니다. 수학 박사 학위를 딸 수도 있고 다른 분야의
학위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학을 공부할 수도 있고 살림살이의 요리, 요리 같은 것을 공부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통에서 자유로와지도록 여러분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야 처음부터 여러분 마음이 산뜻할 수 있고, 그래야 늘 다른 것을 발견해 낼 능력이 생길
텐데도 말이지요. 책에서 배워 여러분의 전통이 되어 버리는 철학, 이론, 신앙이야말로 마음의

장애물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런 것들을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이 이런 것에 길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모든 전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지식과 기술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

이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위대한 수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어떤 문제

를풀려고 그 문제와 씨름했지만 도무지 답을 찾아낼 수가 없더랍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산보하러 나갔다가 문득 그 답을 찾아 낼 수 있었다는군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조용히 가라앉은 그의 마음은 자유롭게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문제

자체가 답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문제에 관한 정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마음이 이런 정보에서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실에 대해서 배우고 정보나 지식을 모읍니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해야 조용히 가라앉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삶의 소용돌이나 문제가 뿌리내리는 토양에서
자유로와지는지를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체에 가입하고, 어떤 철학을 추종하고,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것들 우리의 인간적

인문제를 풀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풀어주기는 커녕 우리를 한층 더 비참하고 슬프게 할
뿐입니다. 필요한 것은 철학이나 신앙이 아닙니다. 자유로이 탐색하고 찾아내고, 창조적인 작업에뛰어들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시험에 합격하려고 발버둥치고, 학위를 얻으려고 논문을 써내고, 취직하려고,
결혼하려고, 엄청난 정보를 모으기도 합니다. 이게 전부입니까? 여러분은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가치 체계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창조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몇 점의 그림도 그리고 괜찮은 시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적인 작업일수 없습니다.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술을 써서
이창조성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것이 무엇이냐는 발견을 통해서 오는 창조적인 마음과,위대한 창조성 없이 기술만 습득한다는 건 무의미합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
창조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지식과 전통과 기억과, 샹카라,

부처,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남긴 말의 무게로 이미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마음이 자유로와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다면, 여러분은 기쁨이 가득 찬 엄청난 삶의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누리는 관계 - 사람들, 관념, 사물과의
관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