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쾌락의 추구-욕망-생각에 의한 그릇됨-기억-기쁨

별관신사 2014. 8. 30. 03:12

전장에서 우리는 기쁨이 쾌락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했으니 만큼, 이제 우리는
쾌락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쾌락은 포함돼 있지 않되 엄청난 기쁨의 느낌과 행복의
느낌을 담고 있는 세계에서 살 수 있는지를 알아내 보자.

우리는 모두 이런 형태 혹은 저런 형태의 쾌락을 좇고 있다-지적, 감각적 혹은 문화적 쾌락,
개선의 쾌락,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사회악을 고치고, 좋은 일을 하는 쾌락-더
많은 지식의 쾌락, 더 큰 물질적(육체적) 만족, 더 많은 체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해, 마음의

여러 똑똑하고 영악한 것들-그리고 궁극적인 쾌락은 물론 신을 갖는 것이다.
쾌락은 사회의 구조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은밀하게,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 놓고 쾌락을 좇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쾌락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것이

우리를 이끌고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명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 쾌락의 문제를 면밀히,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탐구하는 일은 우리들
각자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쾌락을 찾고, 키우고, 지속하는 일은 삶의 기본적 요구이기

때문이며, 그것 없이는 실존은 지루하고, 우둔하고, 외롭고, 의미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삶이 쾌락에 의해 이끌려서는 안되느냐고 물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쾌락이 반드시
고통, 좌절, 슬픔과 공포를 가져오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라. 어떻든 대부분의 세상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나
당신이 슬픔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쾌락의 전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즉 항상 쾌락을 찾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면 왜 마음은 항상 쾌락을 요구하는가? 왜 우리는 쾌락의 저류로서 일을 고상하게
하거나 천하게 하는가? 왜 우리는 쾌락의 가는 끈에 매달려 희생하거나 괴로워하는가?

쾌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건 존재 속에 자리 잡는가? 당신들중에 스스로 이 문제들을
묻고 끝까지 대답을 찾아 보려고 한 사람이 있는가? 쾌락은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존재
속에 들어오게 된다-즉 지각, 감각, 접촉, 욕망이 그것이다. 예컨대 나는 이쁜 자동차를 본다.

그러자 그것을 보는 것으로부터 나는 어떤 감각, 어떤 반응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을 만지거나 만진다고 상상하며, 그리하여 그것을 갖고 싶고 그걸 타고 뻐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또 나는 예쁜 구름, 하늘 높이 맑게 솟은 산, 봄에 방금 눈튼 잎, 아름다움과

웅장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깊은 계곡, 장엄한 황혼, 혹은 아름다운 얼굴-총명하고 생기
있으며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 그래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본다. 나는 강렬한
기쁨을 가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볼 때 거기에 관찰자는 없고

오직 사랑과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있다. 잠간 동안 나는 모든 문제, 불안, 불평을
잊고-거기엔 오직 그 놀라운 것만이 있다. 나는 기쁨으로서 그걸 볼 수 있고 다음 순간
그것을 잊으며, 아니면 마음이 찾아 들어서 문제가 시작된다-내 마음은 그것이 본 것에 대해

거듭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왔던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자꾸 보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생각은 비교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며 <내일 그걸 다시 가져야겠다>고 말한다. 잠간
동안 기쁨을 주었던 체험의 연속은 생각에 의해 계속된다.

그것은 성욕이나 혹은 다른 어떤 형태의 욕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반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적이다. 당신이 내몸에 핀을 꽂으면 나는 대응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마비된다. 그러나 생각은 또 스며들고 그 즐거움을 되씹어보며 그걸 쾌락으로 만든다. 생각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자 하며, 그래서 되풀이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건 기계적이 된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쾌락을 부축인다. 그러므로 생각은 욕망을 통해서 쾌락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며, 따라서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생각에 의해 뒤틀린다.

생각은 그것을 기억으로 만들며, 그것을 되풀이 생각하므로 해서 또 기억은 키워진다.
물론 기억은 어떤 수준의 자리를 갖고 있다. 나날의 삶에서 우리는 그것 없이는 제구실을
다할 수 없다. 그것 자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유효함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기억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은 마음은 참 자유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