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테칸트로푸스(석화인류중 가장 오래된 것. 쟈바원인)나 그 밖의 유인원의
발견도 성서의 진리를 흔들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대계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대계로 바뀐 것이나, 신대륙이나 새 별의 발견이
그것을 흔들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우선 첫째로,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과 그 분이 지구상에 출현함에 수반하여
일어난 많은 사실들을 굳게 믿는다면, 구약성서에 대한 근대의 많은 의혹 따위는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학문적 비판에 의해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간격이 후자에 유리하도록 얼마큼 단축되고, 따라서 다른 피조물이 이제까지보다
다소라도 좋은 취급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 하거나, 모든 자연현상을 곧바로
종교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그다지 효과가 없으며, 또 현대인의
정신에 있어서는 오히려 무익하기도 하다. 자연과학은 학문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되도록 널리 해명하고자 힘써야 하겠지만, 이 경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 자연과학은 그와 같은 활동
범위로 만족해야 할 것이며, 학문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은 과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할 것은 아니다. 여기에
본래의 논쟁점이 있다. 우리도 자연의 법칙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인
까닭에 결코 우연히, 혹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자연을 창조하고
이것을 지배하는 영적 존재를 전제로 한다. 만일 세계가 순전한 혼돈으로써
일체의 존재법칙을 갖지 않는다면(잠시나마 그와 같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 그 경우 세계는 정말 신 없이도 존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이 무엇인가는 인간의
어떤 학문도 -이를테면 신학, 철학, 그 밖의 어떤 학문도-그것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기도가 신을 예배하는 가장
저속한 관념이나 형식과 다른 점은 다만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4:24에 있는 이상으로 자세히 말씀하지 않았다.
그 밖의 경우에는 다만<사실> 그 자체를 근거로 하여 말씀하셨다. 이를테면
부자 관계와 같은 극히 인간적인 비유를 얼마쯤 설명으로 사용한 데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구약성서 전체를 보더라도 출애굽기 34:6.7 의 아름다운
구절 이상으로 깊이 들어간 설명은 어느 곳에도 담겨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은 실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의 본질은 완전과 자애라는 것으로
우리의 지상 생활에는 만족해야만 한다. 더욱이 신은 우리의 행동을 심판하는
점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아니 그보다도 더 우리가 바라는 이상으로
무한히 관대하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신을 파악할 수도 없고,
정의하거나 공식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신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5.6 및 34:10에서 이미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신 것을
경험할 수는 있다.-이것은 오늘날에도 당시와 아주 똑같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에 대한 경험이, 그 자체가 아름다와 종종 인용되는
((파우스트))의 시구에는 결여되어 있다. 과연<이름은 울림이며 연기이다>,
누가 그것을 신이라 부르고, 나는 그것을 경험했었더라면 주인공 파우스트의
생애는 -그리고 작가 괴테의 생애도 -달리 보다 나은 것으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