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 시대의 학문적인 신학과 그리스도가 바랐던 참된 기독교
사이에는 항상 차이가 있다.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전형적인 대목은
요한복음 제 3장이다. 박식한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찾아와서 진지하게
<상대의 호의를 얻기 위한 미사>를 늘어놓는다. 즉 오늘날의 이른바
상대를 일단 <칭찬>하여, 그로써 이 학문이 없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해놓고, 그 뒤에 뭔가 교훈을 내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 니고데모의 교훈을 간단히 가로 막았다. <우리는
스스로 보거나 듣거나 하여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한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역시
존재하는 양자의 차이이다. 사람은 기독교를 <가르칠>수는 없다. 다만
기독교를 인도하고, 조용히 입문 지도를 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상대가 차츰 스스로 듣거나 보거나 할 수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점에서는, 기독교는 사실 학문의 성질보다는 차라리 훨씬 밀교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밀교라 할지라도 기독교는 그 모든 부분이 만인의
눈앞에 공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도,
파악하지도 못한다. 더구나 그것은 반드시 학문이 없는 탓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도 신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즉 갖가지 학문적 연구에 의해서가 아니고 굳은 신앙으로써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누가복음18:17). 신학은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없으면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그리스도교 그 자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