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6월 10일

별관신사 2014. 6. 28. 04:43

브룸하르트나 그 밖의 역사적으로 확증되어 있는 기적을 행한 사람들의
<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십중팔구 오직 <사욕이 없는> 사랑이었다.
이와 같은 형용사를 덧붙여야 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또 이와 같은 이인(다를 이, 사람 인-입력자주) 들의 무수한
모방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자신에
있어서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거나 때로는 이 이상한 힘이 감퇴하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그것과 불가분으로 결부되어
있는 신앙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이른바 값진 진주로서, 그것을 손에 넣으려면
다른 일체의 것을 버려야 하며, 또 이 사랑은 꾸준히 시험 당하고 쓰여지는

것이므로 언제 어느 때든지 현존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랑은 불과
같이 부단히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여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게다가 절대로 속이거나 할 수도 없다. 신앙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또 남을 설득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오직
진실만이 문제가 된다. 무릇 가식적인 것은 시련의 날을 만나며, 그때 실로

무서운 응보를 받는다. 사랑이라는 이 인류의 성스러운 보배는 그것을 위조하는
날에는 반드시 벌을 받고 말 것이다.
신앙의 열쇠는 원래 사랑이다. 신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는 한 신앙은 어렵다. 그러나 뒤에 일단 이 반감이
완전히 해소되면 그것은 용이해진다. 이 장애를 뛰어넘는 데에 신학 같은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즉 이 반감을 떨쳐

버리는 것밖에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는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도, 그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
정면으로 그것을 비난해도 좋다.


성령 강림제 전야 (사무엘 하 5:24)

<너희는 이미 정결해져 있다.> 이제 하루만 더 참아라.
나의 오래전부터의 신뢰여, 다시 한 번 견디어 내라.
이미 조짐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의 은총은
넘치는 흐름이 되어 네 위에 쏟아질 것이다.
이제 잠시만 더, 오, 마음이여, 낙심해서는 안된다.
뽕나무 속에서 벌써 소곤거림이 들린다.
주여, 이제 말씀을 내려 주소서, <빛이 있어라>고,
그러면 날이 새고, 악몽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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