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완전히 도착된 종교교육은, 신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고작
신을 두려워하는 것밖에 가르치지 않는다. 실은 그 이면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그 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유일신을 갖는
행복을, 대체로 인생의 말년에 비로소 아는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에서 약간
비통한 어조로써 말씀하고 있는 탄식 -즉, 이 유일신은 <이전에 이 신 이외의
온갖 신들(때로는 몹시 불순한 신들)이 가지고 있던 성질들을 일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탄식은 오늘날도 역시 완전히 살아 있는 진실이다.
예레미야30 호세아 2
또 복음서는, 특히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은 모두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써 설교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영이 담기지
않은 설교나 오직 형식적으로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사람들을 진리에 대하여 더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민중을
기독교로부터 등을 돌리게 해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 6:63
신을 두려워하는 것밖에 가르치지 않는다. 실은 그 이면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그 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유일신을 갖는
행복을, 대체로 인생의 말년에 비로소 아는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에서 약간
비통한 어조로써 말씀하고 있는 탄식 -즉, 이 유일신은 <이전에 이 신 이외의
온갖 신들(때로는 몹시 불순한 신들)이 가지고 있던 성질들을 일단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탄식은 오늘날도 역시 완전히 살아 있는 진실이다.
예레미야30 호세아 2
또 복음서는, 특히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은 모두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써 설교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영이 담기지
않은 설교나 오직 형식적으로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사람들을 진리에 대하여 더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민중을
기독교로부터 등을 돌리게 해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 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