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이나 근대의 그 어느 신의 종에 비하더라도, 지금부터 3천년
이상 전에 전혀 다른 상황 아래서 생활한 유태의 왕 다윗만큼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친근하고 또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이해 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주목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신과의 교제에는 어떠한 외적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영원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최상의
증명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장래에도 마찬가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다윗의 노래, 이를테면 시편 제18편 같은 것은, 만일 우리의
마음이 바른 상태에 있다면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
그대로라고 할 수가 있겠다. 생사를 주관하는 전능한 주와의 마음으로부터의
교제는 실로 다윗왕이 최초로 실천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우 큰 결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사랑 받는자)이라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언제나 신의 <총아>였었다. 이름뿐인 종교가 이와같은 신과의 관계를
우리에게서 빼앗는다면 안 될 일이다.
인간이 확실히 가능한 신과의 결부 방법으로부터 멀어지기가 무섭게 신의
최대의 적인 동물적인 관능욕이나 가공할 미신의 지배에 빠지게 마련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두 가지 징조가 역력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문명국의 국민들이 유물주의의 시대에 살며,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한 일종의 과대망상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과의 생명 줄을 거의
잃은 끝에 이제는 이미 <유혹의 힘(데살로니가 후서 2:11)>의 분명한 전조
아래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19, 3:15.22-25. 4:3-6.
이제 우리는, 무한한 것같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아주 불유쾌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새로운 발견의 시기로 이어질 것이다.
즉 오늘날 이미 저마다의 개인이 자기 내부에서 헤치고 빠져나가야만 하는
시련을 이제부터 여러 국민들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