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부부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며 또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얘기를 익히 들은 바
있는 헤르메스 신은 남루한 여행자로 변장해서 그 노부부의 오두막에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채석장에서 일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손님을 맞이했다. 할먼니는 어서 오시
고인사와 함께 곧 물 한 대야를 떠다 주어 손님이 발을 씻고 기운을 되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양식이라곤 사실 두 부부가 먹을 것밖에 없었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한 주전자의 우유와
한 조각의 빵을 낯선 여행자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내놓았다. 헤르메스 신이 아주 탐욕스럽게
먹어치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하긴커녕 오히려 더 대접할 것이 변변히
없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정도였다.
역시 이 부부에 대한 좋은 평판은 사실과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헤르메스 신은
자신의 신령스런 본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헤르메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일부러 너희에게 상을 내리려고 여기 왔노라. 황금이 갖고 싶으냐? 아니면 너희
농토를 아테네 제일 가는 옥토로 만들어 주련?
그러나 할머니는 한 참을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재산이야 지금까지
부족한 줄 모르고 지내 왔는데요, 뭐. 단 하나 소망이 있다면, 제가 우리 영감보다 먼저
죽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영감 없이 산다는 건 견딜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너를 다시 젊고 아름다움 소녀로 만들어 주는 건 어떻겠느냐? 헤르메스 신이
물었다.
싫습니다. 영감보다 오래 살지 않도록만 해 주십시오. 할머니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그리 되도록 해 주겠노라. 말을 마치면서 헤르메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헤르메스 신의 방문을 받았다는 말을 할아버지에게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자기가 없어지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자기를 황천으로 가면 꼭 재혼을 하라고 할아버지에게 자꾸자꾸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입버릇 처럼 대답했다. 임자가 아직 통나무처럼 단단한데 뭘 그런
얘길 하고 그러나? 그런 얘기는 더 있다가 해도 돼. 아무튼 난 너무 늙어서 생판 낯선 여자를
집에 들여놓고는 견딜 자신이 없어. 더구나 나같은 늙은이를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어?
자상한 남편과 아담한 농장을 가질 수 있다면 여자한테야 그만이지요. 영감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밥도 때 맞춰 해 줘야죠.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가 목도
축이고 손도 씻을 수 있게 해 줘야죠. 그걸 다 누가 하나요? 여자가 해 줘야죠. 할머니의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해 대면서 하도 달달 볶는 바람에 마침내
할아버지는 재혼을 한다고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막상 그러고 나니까 할머니한테는 또
다른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가서 말했다.
유언장을 작성하기 전까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읍내에
가서 서기를 좀 불러오세요. 유언장을 만들게 말이에요.
유언장이라니! 할아버지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 필경 할머니가 실성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임자, 당신이 뭐가 있어서 물려주고 말고 한단 말이오? 기껏해야 주전자 몇 개와 프라이팬
몇 개인데. 하지만 할머니가 하도 완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하는 수 없이 서기를
부르러 갔다.
서기와 단 둘만 남게 된 할머니가 하나씩 일러주었다. 모든 게 사랑하는 남편 몫이라고
쓰세요. 이기적인 친척들 몫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우리 저 착한 양반이 재혼을 하고 나면,
그의 아내에게 내 소중한 모든 걸 주겠어요. 페키니아제 은 머리핀, 거북이 껍질로 만든
머리빗 세트, 유리 노리개, 금반지 일체를 주겠어요.
서기가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헤르메스 신이 할머니 앞에 나타났다. 왜 거짓 유언을 했지?
화가 난 목소리로 헤르메스 신이 다그쳤다. 너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가진 게 뭐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지? 가지지도 않은 것을 할아버지의 후처에게 주겠다고 유언장에 쓰다니.
그리 쓸 수밖에 더 있겠어요? 가련한 할머니가 되물었다. 지조없는 영감은 약속까지 했으니
재혼을 하겠지요. 하지만이제 이렇게 떡 하니 유언장을 만들어 놨으니, 새 마누라는 진짜로
자기한테 넘어올 값진 보물들이 있는 줄만 알테고, 날이면 날마다 그 보물들을 내놓으라고
영감을 쪼아 대면서 잠시도 못살게 굴죠. 잘하면 한 달도 안 가 영감이 황천으로 올테로 우린
다시 합칠 수 있겠죠.
교훈:사랑과 다이아몬드는 더러운 흙에 섞여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