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공저] (가제) 창발사회론 (2) - 1. 슬픈 20대 (연결)|

별관신사 2013. 1. 20. 22:12

산업화와 경제성장 속도와 비례하여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서서히 학력간 소득격차를 줄이고 있었다. 1995년도에 이르러서는 대졸과 고졸간의 임금 격차가 최대한 좁혀졌다. 첫 월급이야 달랐지만 고졸 후 4년이 지나면 대졸과 같은 나이가 되는데, 생산 현장에서 4년의 경력을 쌓고 잔업수당 같은 여러 명목의 수당을 더하면  같은 나이의 대졸 신입사원보다 더 받는 경우도 많았다. 

 

     공고를 졸업하고 대기업 생산직에 취업해서 10년~15년 이상 열심히 일하면 차도 사고 집도 샀다. 고졸 중산층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대로만 갔으면 유럽 부럽지 않은 이상적인 임금구조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대기업 생산직에서 승진한 유능한 10년차 고졸 엔지니어는 대졸 신입 엔지니어들에게 현장 실무를 가르치면서 직업적인 긍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IMF 사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혹독한 구조조정 선풍이 지나가고 나자 잠시나마 직장을 잃었던 이들은 다시 현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필요한 인력이니까 기업에서도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정규직이었다. DJ가 도입한 지나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고졸 vs 대졸 사이의 임금 격차를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 갔다.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이 학부모들의 뇌리를 지배했다. 대학진학율은 갈 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유명 온라인강의 전문업체에서 고1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대학진학설명회에서 그 회사 사장이 학부모들에게 한 발언이 한동안 인테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제가 81학번인데요. 그 당시에는 일류대학은 3개 밖에 없었어요. 'SKY' 대학, 이게 예전의 일류대학입니다. 그런데 입시가 좀 치열해지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서성한이' 정도 대학이 일류대학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4, 5년 전부터 무슨 소리냐. 위 대학은 초일류 대학으로 바뀌었어요. 그 다음은 '중경외시' 포함해서 소위 11개 대학이 2년 전까지는 일류 대학이었어요. 근데 2년 전부터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 여기에다가 어디까지 들어가냐면, 2년 전부터는 '건동홍숙'까지 15개 대학이 우리나라의 일류대학이고, 명문대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여기에는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많이 왔겠지만, 가정을 전국 평균 분포와 똑같다치면, 여기 한 2500명 정도 와계시는데, 이중에 여기 15개 대학에 들어갈 확률은 5% 밖에 안됩니다. 130명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머지 2,300 여 명은 여기와 관계 없는 대학에 갑니다. 아찔하죠? 여러분들께서는 건동홍숙 무슨 소리냐 그런 생각하셨겠지만은 아셔야될 게 여기 15개 대학 정원이 몇명이냐면 40,064명입니다. 매년 70만명 정도가 수능을 보기 때문에 5% 밖에 안됩니다. 어떤 집단에 있어서 100명 중에 다섯명이라는 존재는 탁월한 존재죠. 리더죠. 이 대학에만 들어가면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업고 다녀야 됩니다." (주: SKY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성한 =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이대. 중경외시 = 중앙대, 경희대, 외대, 시립대. 건동홍숙 = 건국대, 동국대, 홍대, 숙명대.)

 

     대졸, 고졸 문제가 아니라 같은 대졸도 이렇게 한 줄로 쫙 서열화되었다. 이 서열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죽는다. 대학을 나오더라도 경쟁력 있는 상위 5%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이 학부모들의 뇌리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들만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20대 초반에서부터 같은 세대 내부의 불화가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위 서열에 끼지 못하는 대학 중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대학은 몽땅 '서울대'라 부르며 자위한다. 서울에 소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새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일단 서울시 경계만 벗어나면 '지잡대'가 되어버린다. '지잡대'는 지방에 있는 잡 (잡 것?) 대학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조적인 단어는 대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슬픈 신조어다. 

 

     서울에 모든 명문대가 모여있다 보니, 20대 초반부터 서울 집중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지방의 젊은 세대 고갈은 지방의 사기를 갉아먹고 지방의 미래를 황폐화시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지방대 학생들도 졸업 시즌이 되면 취업을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다. 서울에 살면서 성적 때문에 지방대학에 내려간 학생들도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돌아온다. 세종시 백 개 만들면 뭐하나. 도로 서울로 서울로 몰리는데. 서울의 20대는 과도한 경쟁으로 적자생존의 전쟁터에서 시달린다. 정글 자본주의가 대학부터 시작되면서 동세대 간의 경쟁/갈등 구조는 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교실의 수업 풍경은 더욱 절망적이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것이고 학교는 졸업장을 받기 위하여 출석하는 휴게실일 뿐이다.

 

     1999년 7월 1일 김대중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했다. 교사들의 노동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여러 이유로 해직된 교사들도 학교로 돌아왔다. 그들은 전인교육을 말한다. 전인교육? 지금 지금 고교를 다니고 있거나 갓 졸업한 학생들에게 몰어보라. 실지로 학교에서 전인교육이 행해지고 있는지를. 공교육의 황폐화와 함께 거대한 사교육 시장은 학부모들의 중산층 진입 또는 유지에 걸림돌이 된지 오래다. 전교조는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초기의 전교조는 실패했고 심하게 변질되었다. (다수 전교조 교사의 종북 성향은 시대착오적이지만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사의 전교조 가입 여부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교사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 세대는 우리사회 전 세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교복을 입지 않았고 사교육 없는 세상을 경험한 세대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었을 때, 임신 단계부터 자신들이 누렸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원정출산부터 시작하여 조기교육, 임신으로 부른 배 위에 헤드폰을 올려놓고 태아에게 영어테이프를 들려주는 극성으로 시작하여 영어발음을 좋게 한다면서 아이들의 혀를 수술시켜 국제적으로 망신을 사기도 했다.

 

     전두환 시절에는 사교육이 정말 없었을까?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니까 없었겠지? 천만에. 당시 있는 집 자식들은 대부분 '몰래바이트'라는 불법 과외로 불공정 게임을 했다. (이 때 '있는 집'이라 함은 '돈' 있는 집과 '권력' 있는 집을 통칭한다.) 비록 일부지만 별로 떳떳치 못한 과정을 통하여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 잡는 것을 직접 경험하거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그 경험이 자기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20대들이 고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386세대가 20대의 부모가 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들은 지구상 최대의 사교육 시장을 만들면서 자녀 세대에게 사상 최악의 무한경쟁 구도와 대학 서열화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 중 5%만 이 살벌한 서열화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고, 나머지 95%는 해외로 탈출하지 않는 한 꼼짝없이 이 소외 속에 갇혀야 한다. 

    

     2013년 1월, 알바몬이 대학생 44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새해 관심사’ 1위로 ‘등록금, 물가, 생활비 등 돈(30.7%)’을 꼽았다. ‘취업 및 취업준비’는 21.5%로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부분은 20대가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실지로 등록금을 부담하는 세대는 그들의 부모인 50대다. 목돈이 준비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자식 등록금 대느라 집을 담보로 빚을 내고, 사채업자에게 손을 벌린다. 그래도 안 되면 자식을 휴학시키거나 군에 보낸다. 이런 상황에서 반값 등록금이 2012 대선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박근혜 후보는 가난할수록 더 많은 장학금을 주되 공부를 게을리하는 학생에게는 혜택을 안 주겠다고 했고, 문재인 후보는 보편적복지론으로 전국의 대학생 전원에게 무조건 등록금 액수를 절반으로 확 깍아주겠다고 하면서 유권자에게 심판을 구했다. 그 결과 (물론 다른 요인도 작용했겠지만) 실지로 등록금을 부담할 50대 유권자 중 436만명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고, 260만명이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다. 대부분의 자녀가 대학생일 가능성이 높은, 그래서 실지로 등록금을 부담해야 할 50대의 선택이었다.

 

     어느 쪽이 옳으냐는 유권자의 몫이니 재론할 필요없다. 그러나 만약 반값 등록금에 문재인 식의 보편적 복지를 적용한다면 여기에는 또 다른 모순이 발견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사회에 나가는 고졸 20대들에게는 단돈 10원의 혜택도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졸자들은 고졸자들에 비해서 (취업시장 등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설텐데, 그나마 국민의 세금을 걷어 집행하는 정부조차 비교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고졸자보다 강자인 대졸자의 편에 서는 것은 모순이다. 국가의 등록금 보조가 대학생이 하는 '공부'를 지원하는 것이라면 박근혜 식의 '열심히 공부하는 데에 대한 복지'가 고졸 20대와의 형평성 차원에서 논리적이다. 여기에서 엉뚱한 상상 하나 해 볼까?

 

     만약 한 학기에 500만원짜리 대학 등록금이 있다 치자. 여기서 50%인 250만원을 정부에서 보편적으로 보조해 준다면 4년이면 2천만원의 국가 돈이 지원된다. 이 2천만원을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고교 졸업생에게 전액 현금으로 지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현재 무려 84%에 이르는 대학 진학율의 20~30%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실업계 고교가 늘어날 것이고, 실업계 고교의 내실화까지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다. 고졸자 취업시장이 확대될 것이고, 실업율도 급격히 줄 것이다.

 

     대학 4년간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을 퍼붓는 대신, 미리 실속을 차리고 남들보다 4년 먼저 사회에 나가 4년의 세월을 경험으로 가득 채우면 어설픈 대졸자들보다 오히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1995년 이전을 살아 본 세대는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스스로 대학교육을 거부했던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꿈 같은 이야기라고? 아니!(No!) 스웨덴에서는 실지로 '생애 첫 자금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20세가 되면 현금으로 약 2000만원을 준다.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그냥 준다. 어떻게 쓸 지도 묻지 않는다. 20세면 성인 아닌가? 성인이 된 그들이 생애 첫 지원금으로 술만 퍼마시고 다 날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무의미한 수치로 생각한다. 이런 꿈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No! 스웨덴의 GDP 대비 조세부담율은 46.5%고 한국은 고작 20%대라는 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낼 가능성도 방법도 거의 없다. 이런 논리는 어차피 엉뚱한(?) 상상을 전제로 했으므로 일단 논외로 치자.       

    

     5% 명문의 입시생 경제학? 이런 세태에 묻어가는 것은 정답일까? 서열화의 5% 내에 들어가야만 존재감을 과시하고 성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성공과 행복의 지름길이 맞기는 맞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지금 20대의 부모 세대인 4050세대에게 물어보면 절대 안 된다. 그들은 대답할 자격이 없다. DJ정부 시절의 20대였던 현재의 30대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역할로부터 소외되어 방치되었던 20대 자신이 대답해야 된다. 이는 지금의 20대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80년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95%에 해당하는 20대 초반 세대는 '역할도 없고 존재감도 별로 없는' 고졸 또는 지잡대라는 서열 구조에서 황금같은 20대를 출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에서는 겪지 않아도 될 자괴감을 꽃다운 20대에게 선사했고, 이에 대한 대책도 제대로 세워주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 이것이 지난 DJ, 노무현, 이명박 정부로 이어진 '잃어버린 15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2012년 대선 승리 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전경련을 방문하여 대기업 총수들에게 “지금 같은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진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도 있었고 국가 지원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 기업은 국민 기업의 성격도 크다”며 “앞으로 경영의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혜와 고통 분담에 나서 달라”면서 “한창 일할 나이에 퇴출시키는 고용형태는 앞으로 자제돼야 한다”고 일갈하자,(2012.12.26) 전경련 허창수 회장은 “학력. 성별. 연령. 장애우 등 구분 없이 양질의 일자리 많이 만들겠다”고 화답하고는 재차 전경련 회장단 회의를 열어 "고용 유발 효과가 높은 산업에 대한 투자를 우선적으로 검토하고, 조선·철강·건설 등 불황 산업 중 고용 조정이 불가피한 일부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와 협의하여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납작 엎드렸다.(2013.01.11) 물론 이들이 얼마나 약속을 충실히 지킬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 불똥은 여러 곳으로 튀었다.

 

     은행권이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줄이는 등 ‘일자리 차별’ 없애기에 나섰다. 은행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일자리를 잃는 계약직을 고용이 안정적인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돌리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KDB산업은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졸과 일반 대졸 직원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산업은행은 비정규직을 따로 채용하지 않는 대신 은행 창구·지원 업무만 담당하는 ‘일반직B’와 대졸자 공채 출신의 ‘일반직A’로 나눠 직원을 선발했다. ‘일반직B’는 고졸 직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2013년부터 일반직B 직군은 대졸 행원보다 입사를 할 때 직급이 하나 낮을 뿐 업무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2012.12.30)

 

     햐.... 이렇게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15년 동안 미루면서 도대체 뭘 했다는 말인가. (대저, 원칙과 약속, 신뢰의 정치 리더십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러하다. 경제는 심리다. 이런 현상이 딱 5년만 꾸준히 지속되어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다.) (관료주의에 대한 문제는 3편에 쓸 예정입니다.)

 

     비록 KDB산업은행 혼자의 결정이지만 이렇게 쉽게 고졸과 대졸의 차별이 철폐되다니.... 이런 분위기가 전 사회로 확산되어 1995년 피크를 이루었던 대졸과 고졸간의 임금격차 해소현상이 새로운 고용문화로 정착되어 후대에 상속될 수 있을까? 만약 이 분위기가 전 사회로 확산된다면 대학 진학율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화끈하게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단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 대기업 근로자나 은행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고작 13%로 너무 낮고, 눈치보기에서 출발한 고용문화가 당분간 대기업 등에서 일시적으로 유지된다 하더라도 눈치보기 5년이 끝난 후에는 또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시장과 도덕성은 손톱만큼의 헛점만 보여도 순식간에 괴리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앞에서 예를 든 아일랜드의 메리 로빈슨 시대가 끝나자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고 뒤를 이어 IMF가 아일랜드를 덮친 것처럼 박근혜 시대의 고용문화가 5년 동안 확고하게 뿌리내린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10년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물론 <고용 이외의 부분>에서 엄청난 먹거리나 일자리가 창출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것도 불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대 초년병의 서열화와 이에 따른 세대 내부의 갈등구조 해결을 위해서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부터 시작하여 취업, 창업에 이르기까지 풀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 역시 <고용 이외의 부분>에서 뭔가 획기적인 일이 발생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다.)

 

     20대 초년의 서열화는 그대로 20대 중/후반 취업의 서열화와 곧잘 연결된다. 이른바 '신의 직장'은 연봉이나 고용안정, 사회적 지위, 조직의 네임밸류 등에 따라 결정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기가 되면 장래의 꿈이나 희망을 달성할 '직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서열화 된 '직장'의 취업에 매달린다.

 

     이때쯤 되면 '신나는 일'에 대한 의욕이나 '꿈'은 사라지고 '밥그릇'에 대한 서열만 남는다. 이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직장에는 귀천이 있다."는 말이 자조적으로 생산되어 유포된다. 신의 직장을 구하고 명함을 새기게 되면 연애상대나 결혼상대 또한 비슷하거나 몇 단계 위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게 잘 안 되면 그냥 혼자 산다. 여성들의 미모 또한 경쟁력과 서열화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대학 입학 전이나 방학 때의 성형외과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신의 직장'을 향하여 '꿈'과 '신명'을 내팽개치고 서열화 속으로 부나비처럼 뛰어드는 수 십, 수 백 만 젊은 구직자들의 행렬은 그래서 슬프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의 '스티브 잡스'는 탄생하기 힘들다.

 

     중소기업이 '꿈의 직장'이었을 때는 있었을까? 딱 한 번 있었다. 2000년 김대중 정권이 벤처 열풍을 만들었을 때였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적게 먹고 길고 가는 똥 싸는 놈으로 치부되었고 소기업이라도 '벤처기업'으로 지정받은 회사에 취업하는 놈은 굵게 먹고 굵은 똥 싸는 멋진 인생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지나고 보니 모조리 거품이었지만 당시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부추키는 판이었으니 믿지 않을 재간이 없었고, 뒷차 타는 놈은 바보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중소기업이라도 코스닥 상장 가능성만 살짝 비치면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기업의 사장이 인심 쓰듯 사원들에게 나눠주는 몇 백 장의 주식만 내다 팔아도 몇 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 주머니에 굴러 들어오는 판이었다. 이러니 대기업보다 '가능성 있는 중소기업'이 돈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20대 여직원들도 명품 쇼핑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그래도 이 때가 유사 이래 최초로 중소기업이 '꿈의 직장'으로 등극했을 때였다. 만약 이 때의 벤처 열풍이 시장의 수요를 기반으로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었더라면 그보다 더 이상적인 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더라면 20대 초반의 서열화 문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했다.

 

     당시의 벤처 열풍는 수요(시장) 없는 창업이라는 점에서 거의 사기극에 가까운 거품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벤처 창업이 없는 시장은 있을 수 없다. 지금도 수 많은 기업이 태어나고 쓰러지고 있다. 경제도 하나의 생태계이기 때문에 기업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창업이 많을수록 그리고 창업된 기업들 중에서 살아남는 기업이 많을수록 그 나라의 경제는 역동적이다.

 

     그리고 이 부분만 제대로 활성화 되어도 현재의 20대와 그 부모 세대인 50대의 고민 중 적어도 취업에 관한 고민은 상당 부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나라에서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활약할 분위기까지 마련된다면 2030세대 뿐만 아니라 전 세대가 직/간접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국가의 탄생 자체가 벤처였다. 그리고 지금도 벤처 기업을 키우기 위하여 국가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근혜 정부가 벤치마킹하려는 '요즈마 펀드'다. 이스라엘에는 인구 930명당 1개꼴로 벤처기업이 있다. 1990년대 정부가 출자한 ‘요즈마 펀드’가 창업 도전자들의 돈 걱정을 덜어준 덕분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는 '요즈마 펀드'를 도입하면서도 DJ 벤처 말기 벤처 공포증까지 유발했던 모럴해저드와 후유증이 발생할 것에 대하여 극도로 신중하다. 

 

     "박근혜 정부는 특정 목적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 관련 예산을 몰아주며 과도한 관심을 촉발하는 형태의 붐 조성은 추진하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붐 조성이 특정 분야에 대한 정부 예산의 집중지원→과도한 투자 유입→거품 형성→국민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새 정부의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폴리뉴스 2013.01.10)" 특히 시장이 전제되지 않은, 수요가 불확실한 가운데 발생하는 벤처 버블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우리의 20대가 들어 갈 새로운 문은 있을까? 우연성과 의도되지 않음, 자발/자생적, 개체(요소)간의 영향, 되먹임 현상과 자기조직화 등이 전제되는 복잡계에서 발현될 창발사회가 다가오고 있는데 국가 주도의 모델이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을 예측하려면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할까?

 

 

<3편에 계속>

 

2013.01.15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