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시골이장의 작은 날개짓이 부른 기적.
1950년대. 5천년을 이어 내려온 가난의 고리는 6.25 전쟁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봄이면 보리가 추수되기 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농촌 관공서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다.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말은 농가에 양식이 떨어져 굶어 죽는 가구를 근절하자는 궁기 도는 표어였다.
그나마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농촌 남정네들은 술과 노름 아니면 할 일이 없었다. 우리나라 농촌의 가난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지는 민족의 숙제였다. 복잡계로 설명하자면 절망적인 혼돈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이런 절망적인 혼돈 속에서 뭔가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20대 후반의 젊은 이장은 이런 세태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당시 시골 깡촌인 신도리에는 농로조차 없었다. 그는 한숨을 뒤로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호소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봅시다. 우리 마을에는 그 흔한 농로(농삿길)조차 없습니다. 거름이며 땔감도 계속 지게로 져 날라야 합니다. 허리 아프지 않습니까? 자전거나 리어카라도 다닐 수 있게 먼저 농로라도 냅시다.' 20대 후반의 이장의 갸냘픈 날개짓에 사람들이 하나 둘 삽과 곡괭이 등을 들고 나왔다.
1950년대. 측량도 할 줄 모르고 불도저 같은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냥 눈으로 대충 길을 정하고 허리가 빠지게 일했다. 사람이 모자라 옆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했더니 옆동네 사람들도 나와 도와주었다. 길을 내려니 인력으로는 어려운 장애물도 있었다. 관공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경찰서장을 찾아가 폭약 좀 있으면 도와 주시오. 부탁했더니 경찰서장이 선선히 도와주어 발파작업도 할 수 있었다.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야 하는 곳도 있었다. 처음에는 배째라 하며 버티던 집주인에게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밭떼기를 마련해주면서 설득했다. 마침내 불가능할 것 같았던 농로가 뚫렸다. 43일만에 폭 4미터 길이 2500미터의 농로를 완성한 것이다. 1957년의 일이다.
한 번 불 붙은 농촌 사람들의 열정은 더욱 불 타 올랐다. 각 농가의 부엌을 개량하고 마당을 깨끗하게 꾸몄다. 일단 일이 시작되고 보니 경쟁심도 생겼다. 이것이 1959년. 서서히 자신감이 붙었다. 이번에는 부업도 좀 해보자. 젊은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호당 감나무 묘목 50주 이상, 사과나무 100주 이상을 배정, 과수 기술을 전수하고 '이건 돈이 된다.'는 분위기를 당기자, 해가 다르게 과수소득이 배가 되어 호당 평균 300주 이상의 소득이 생겼다. 당연히 마을 전체의 소득이 올라갔다. 모처럼 농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열의는 더욱 불타올랐다.
이것이 1961의 일이었다. 같은 해 서울에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1962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야심찬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동되었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으로는 아직 농촌에 어떤 가시적인 정책도 펼 수 없었다. 시골 깡촌이었던 신도1리의 부흥은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자조自助'라는 개념으로 스스로 이룩한 '작은 기적'이었다. 긍정적인 되먹임 현상이 마을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1963년도에 생활개선 구락부 운영, 쌀을 아껴 저축하는 절미저축으로 시작하여 공동구판장을 운영하고, 마을 일을 공동으로 작업하는 등의 협동마을로 성장하여 남녀가 협동하는 마을, 단결이 잘 되는 마을, 씨족 개념이 없는 마을, 개미처럼 일 하는 '개미마을'이란 별칭을 받았다.
개미는 복잡계 이론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하는 무리살이 곤충이다. 이제 마을사람들의 힘은 1+1=2가 아니었다.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도 모여서 서로 도우면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했다. 이렇게 개별 단위의 합보다 전체의 힘이 커지는 경우는 흔하다. 이것이 복잡계다.
열정을 풀 일이 생겼으니 손해가 나도 신이 났다. 한국인은 신명의 민족이다. 일단 신명나는 일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민족이다. 참으로 신명나게 일했고 그 결과 마을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마을로 변모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국적으로 이런 농촌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던 시절이었다.
기왕 신명이 났으니 좀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우리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자. 우리 농부들의 힘으로 그게 가능할까? 아냐. 가능할 거야. 우린 우리 힘으로 지금까지 모든 걸 다 해냈잖아? 하면 돼. 안 해서 못 하는 거지, 하면 된다니까?
일단 목표를 정한 마을사람들은 무일푼으로 간이역 설립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1966년 1월부터 1년여간 철도청, 지방청, 보선소 등에 내집같이 출입했다. 마침내 1966년 12월 28일 신거역 설립 인가장을 받아냈다. 도구라고는 삽과 곡괭이와 지게가 전부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해냈다. 그리고 1967년 6월 11일 신거역이 개통되었다. (이상 청도읍 협의회장 신도1리 김봉영의 일대기에서 부분 발췌) 그리고 2년 후 바로 그 신거역에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1969년 8월 4일 경상남도의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경부선 철도변에 위치한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마을 어귀에서 대통령 특별열차를 멈추게 했다.
마을의 울창한 산림과 말끔하게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 안길 등이 박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박대통령이 신도 마을의 사례를 소개하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한 것은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70년 4월 22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새마을운동’의 뿌리는 젊은 시골이장의 작은 날개짓과 이에 반응한 마을사람들로 인하여 창발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 그 태동이었다.
직관은 매우 짧은 순간에 창발되나 장기간의 숙고와 학습의 누적이 일시에 분출되는 현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는 것 같지만, 뛰어난 CEO의 두되는 (항상 언제라도 직관적으로 창발할 수 있도록) 혼돈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미시적 섭동이나 동요만으로도 의사결정이라는 거시적 변화를 가져온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도1리의 성공스토리를 분석했다. 그렇다. 자조自助. 스스로 돕는 것. 복잡계로 설명하자면 자기 되먹임 현상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자조自助 정신이 기적을 불렀구나. 이것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일이 대통령이 할 일이다. 이 기적을 전국화하자. 하면 된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철학이나 접근·집행 방법 등은 다른 나라 어디에도 없는 신모델이었다. 산업혁명의 도시화나 기술개발도 아니었고, 국가적으로 시행한 뉴딜정책도 아니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마을운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전문가집단 사이에서도) 새마을운동의 정의에 관한 합의가 거의 없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은 어느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전적 경험 또는 실천에 의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1970년 4월 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 관계기관, 지도자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 자조自助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새마을운동 발의 초기에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워커가 하라고 한다고 그런 게 되나?' 하는 반응이 주류였다. 그러나 여기에 박정희 특유의 리더십이 더해지면서 진짜 기적을 낳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구상한 국가 단위의 새마을운동이 다른 국가정책과 달랐던 점은 지원 차별화였다. 무조건적인 농촌 퍼주기가 아니라 자조自助 실적이 보이면 지원을 확대하는 식으로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빙식이었다. 국가지원은 어쩔 수 없이 탑다운(Top→Down)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지만 농촌의 무브먼트는 자발적인 바텀업(Bottom→Up)을 유도했다.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1971년 박 대통령은 전국 33,267개 행정 리동里洞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마음대로) 해보라는 식이었다. 결과는 달랐다. 절반 정도는 정부지원 시멘트에 마을사람들이 자체적인 노력과 자금을 투입하여 숙원사업을 해냈고, 나머지 절반 정도의 마을에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반응이 나타난 (창발현상이 일어 난) 16,600개 부락에 또 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씩을 무상공급했다. 선의의 경쟁을 유발한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겠는가. (이론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정통 복잡계이론으로 인한 창발이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전국적으로 무수한 창발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인 자조自助정신이다. (근면과 협동은 사실상 자조自助라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일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신도리 주민들이 이룩한 시골 부락 단위의 '작은 창발'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여 농촌의 의식개혁, 사회개혁을 이룩한 것은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적 기조로서 근면·자조自助·협동을 설정하게 되고 그 추진 방법으로서는 우수한 지도자의 헌신적 봉사를 기조로 하고 동시에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지원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5000년 가난의 고리를 끊은 새마을운동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 누가 과연 새마을운동 성공의 주역이었나. 발단은 젊은 시골이장 김봉영과 신도1리 주민들의 창발적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동혁처럼 당시의 농촌을 잘 살게 해보려는 시도는 몇몇 계몽행동주의자들에 의해서 일제시대부터 수십년간 진행되어 왔다. 더러는 성공했고 다수는 실패했다. 전국적인 가난의 고리는 누구도 끊어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런 시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마침내 국가적 성공에 이른 것은 박정희의 리더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 어려운 형편에 (세계 꼴지에 가까운 가난한 나라에서) 일단 전국적으로 시멘트를 공짜로 지원하고, 그 중에서 반응이 나타난 (창발현상이 나타난) 부락만 골라 다시 더 큰 물량을 지원할 생각을 한 것만 보아도, 그리고 공무수행 중에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을, 기차를 세워, 이름 없는 작은 시골마을의 창발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모델로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 했던 새마을운동을 기획한 것 등만 보아도 '상황 발견-실태 조사-영향력 분석-종합기획-재검토-과감한 실행' 등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에서 빈틈없는 박정희의 리더십은 검증된다.
또한 박정희는 적어도 새마을운동에 관한 한 탑다운(Top→Down)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반드시 바텀업(Bottom→Up)을 조건으로 일을 꾸몄다. 하향식 정치구조(Top→Down)에서 상향식(Bottom→Up)개혁을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은 복잡계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복잡계의 도사(?)가 아니었나싶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빛나는 창발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사후, 전두환의 5공 세력이 새마을운동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면서 초기의 새마을운동은 파탄을 맞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이 새마을운동을 장악하여 조직확대와 예산확충에 진력하면서, 1천만 명의 조직원과 5백억 원에 달하는 자산, 각종 성금과 기금의 유용 등으로 부패의 온상이 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돈 놓고 돈 먹기'의 부패 게임까지 벌어지면서 자발적인 바텀업(Bottom→Up)은 사라지고 권력층과 국물족의 탑다운(Top→Down)만 남았다.
하지만 기적처럼 성공한 새마을운동의 사회변혁은 우리 사회에 깊은 감명을 남겨, 전경환의 부패잔치 이후에도 새마을운동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과 부흥, 변혁운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도, 농촌도 많이 변했다. 농촌의 노령화는 심각한 상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화와 정보화로 인하여 사회 전체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위대한 유산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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