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자르 그라시안.

그라시안의 아홉 번째 회상

별관신사 2014. 8. 28. 03:21

마지막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해.
아침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최근들어 부쩍 기력이 약해졌는지 펜촉이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정신만은 또렷또렷하다. 오로지 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도 오늘로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
지난 밤 꿈 속에서 나는 커다란 횐 구름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갑자기
한줄기 햇살이 내려와서 나를 빨아들였다.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 호홉이 빨라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영흔이
육체를 이탈하는 것 같았다. 온몸을 압도하는 평생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오늘 아침은 16S4년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라고사에서의 교수직은 무난했다.

만일 내가 동료 작가를 후원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한 귀중한 시집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호세 아루페이'가 편집한 스페인
명시선집에는 이 시대의 도덕과 관련된 시들이 집대성되어 있다. 이 선집은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어서, 한번 읽어 보아서는 시어(時語)들 배후에 숨은 뜻이
체제에 대한 풍자인지 아부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루페이는 이 선집에서
우리 나라의 참상을 고발했다. 나는 그와 행동을 같이했고, 이 시집을 발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상부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선집의
기초가 된 과격한 서문을 썼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저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후원자인 파라다씨에게 소개한

것뿐이었다. 파라다씨는 이 작품의 기발한 착상을 높이 사서 출판비용을 선뜻
내놓게 된 것이다. 아루페이의 선집은 크게 히트를 켰다. 그러나 우리의 친우
파블로 데 파라다씨는 승리의 축배를 함께 들지 못했다. 스페인 명시선집에

기금을 낸 직후 말에서 떨어져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파라다씨의
장례식에는 생전에 파라다씨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세간에 화제가 된 이 시집에 버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궁정에까지 들어가지 않을리 없었다. 적어도 필럽 4세가
친서를 보내왔을 때까지만 해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읽고
경악했다. 친서의 본론은 단 한 문장 뿐이었다.

<4월 l2일 일요일. 9시 궁전에서 열리는 축하미사에 그라시안 신부를
초대하는 바이다. 필럽 4세>
라스타노사 신부에게 이 긴급 초대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신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발타자르. 자네는 정말 욕심이 없는 사람이군 자네는 명사가 아닌가? 자네
일요미사에 신자들이 넘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직접 확인하고 싶으신 거야.

아마 틀림없을 걸.'
그리고 신부는 덧붙였다.
'국왕은 지금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일요일 아침 궁전에 도착하자. 호위병들은 나를 성당으로 안내했다. 9시
정각에 나는 제단으로 올라갔다. 찬송가가 끝나자, 쿵쿵 뛰는 가슴을 안고
강론대로 나갔다. 필립 국왕은 두꺼운 커튼 뒤에 앉아 계셨고, 그 옆에는

왕비인 듯한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나로서는 생애 최고의 무대였다. 국왕을
향하여 유서깊은 마치고 강론을 시작하였다. 나는 나라에 대한 핵심적 불만을
토로하였다. 나의 목소리는 수십만 명의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강론을 하였다. 처음 입을 여는 순간부터 내 몸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때로는 높이고 때로는 낮추면서
청증들의 주의를 집증시켰다. 나는 격정을 휩싸여 나 자신도 잊고 있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렸다. 나의 강론은 사회병리의 근원 스페인에 대한 애국심,
역경에 처한 국민들의 고통과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도덕의 붕괴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아뭏든 긴 세월 동안 억눌렸던 한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냉엄한 비판을 사정없이 쏟아 내었다. 당시 강론의 끝을 장식한 다음의 말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비참한 인간을 비웃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딪에 걸려, 인생에 속고, 운명에 우롱당하며, 나이에
절망하고, 피골이 상접하며, 약한 일에 빠져 선을 멀리하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가며. 끝내 만족은 찾아오지 않은 채, 인생은 종말을 고합니다. 죽음에

포로가 되어 땅 속에 갇히고, 흙에 덮혀 썩어 영원히 잊혀지고 사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제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상레기가 되고 내일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강론이 끝나자, 나의 몸에 땀은 젖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이어
나는 접견실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물을 한 컵 마시고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건너편에 필립 국왕이 화려한 옷을 입은 한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 국왕은 옆 사람을 소개도 하지 않은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라시안, 훌륭한 강론이었소. 이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 같소.'
그러자 옆에 있던 신사가 나를 향해 프랑스어로 말했다.

'신부, .... 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교육에 대한 질문인 듯 싶었다.
잠시 후. 국왕과 국빈이 나가자, 곧 이어 시종을 동반한 장년의 예수회

수사가 나타나 나를 마차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예수회 수사는 내 팔을 잡고
광장을 가로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듣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똑바로 앞만 본채로 조용히

속삭였다.
그라시안 신부,훌륭한 강론이었소.."
그리고 어깨 너떠로 얼굴을 돌리며,

'국왕 옆에 계시던 국빈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고 묻더니,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프랑스 국왕인 루이 14세입니다. 한창 전쟁 중인데도 군주들은 오찬이나

하고 ......'
참으로 그날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다. 흥분과 피로, 그리고 경악의 하루!
그리고 l2월 쌀쌀한 아침을 맞는 지금, 새삼스레니의 생애를 돌아보면, 이 역시

흥분과 피로와 경악의 반복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피로가 더욱 심하다.
하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편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집필도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왔던 시기가 조국 스페인이 영광스러웠던 시기와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은
어쩌면 신의 의지일런지도 모른다. 나의 사명감은 오로지 세상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남의 눈에 좋지 않게 비쳐졌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뜻을 공감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명석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사심없고 친절한 마음으로 불행한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시켜 줄 수 있는 시대가
오길 진심으로 기대 한다. 사상이 나를 움직인 것처럼, 내가 남긴 글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고무시켜 주길 빈다. 사상이 살아남는 길은

그 길 뿐이다.
머지 않아 주교는 내게 완전히 복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까? 그는 최후의 승자이다. '비판자 제3부'가 완성되고 파라다씨가 남긴

자금으로 책이 출판되면. 그 시기는 앞당겨질지 꼬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교회에서 추방당하고, 작품은 압수될 것이며, 나의 존재는 영원히 사라져 갈
것이다.

진실을 전파하는 사람들과 주교와의 싸움은 내가 사라진다해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진실에 굶주리고 이를 전파하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사상의 자유는 그렇게 쉽게 꺼지는 불이

아니다. 비록 나와의 싸움은 끝났지만, 주교는 나보다 더 무서운 적올 상대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남기고 가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다시 복원한 이 작품이 몰수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종의 계획을

세워 놓았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나는 서명이 들어 있는 두 통의 서류를
준비해 두었다. 한 통은 칼데론 데라 파르카에게, 또 한 퉁은 세고비아 몬트로
추기경에게 갈 것이다. 내가 죽으면 '계시'의 왼본에 그 서류들을 동봉하여

부랑카 부부를 통해 칼데론에게 전달될 것이다. 칼데론씨는 두 가지 일을 해
주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다. 우선 주교 앞으로 서류를 보내고, 원고는 내
친구이며 출판 책임자인 빈첸시오 라스타노사 신부에게 보낼 것이다.

내가 보낸 서류를 읽고 몬트로 주교는 나의 고별사를 과연 받아들일까? 그
내용은 이렇다.
(나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건강한 마음과 분명하고, 무조건적으로 또 깊은

존경심파 아울러 '계시의 완전 원고를 전지전능하신 신과 시대의 변천에
맡긴다. 1658년 12월 2일 발타자르 그라시안 신부>
신께서 내 혼신의 힘으로 엮어낸 이 글들을 빼앗지 않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내 마음은 지금 평온하다. 이 글들은 처음 나왔던 자리로 되돌아 간다.
이 글들은 영원히 만물의 창조자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왔던 자리로 되돌아갈 때는 지상에서 같은시대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을 보낼 것이다. 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적으로 선택한 세고비아 몬트로 추기경에게도 마음 깊이 용서를
청하고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

'계시'를 세상 사람들에게 바친다. 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정신적 양식을 얻을 수 있으며 남보다 오래 살아 남을 수 있고, 또 이 책은
세상에 권할 가치가 있다.

이제 마지막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조금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