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자르 그라시안.

그라시안의 여덟 번째 회상

별관신사 2014. 8. 27. 08:32

중요한 가치를 저울질하는 능력.
창으로 들어닥친 찬 북풍이 맨 처음 겨울 소식을 싣고 왔다. 바람은
상쾌한데 숨이 막힌다. 마을 의사는 흥차에 희귀한 약초를 넣어 신비한 효력을

내는 비상약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오로지 회상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1651년 나는 사라고나로 돌아가. 성서학 교수라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직함을

갖게 돠볐다. 어느날 강의가 끝나자, 한 학생이 다가와서 방금 게시판에 나붙은
경고문을 베껴서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가르시아 데 마몬스' 란 가명으로 나도는 불온책자 '비판자 제1부를

금서로 지정함, 이 금서를 읽거나 토론하거나 소지한 사람은 타락죄에 의거하여
교회에 대한 순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고 엄증한 취조를 받게 됨. 165l년
l월 8일 바르셀로나 교구장 세고비아 몬트로 추기경>

그날은 내가 5o세가 되던 날이었다. 3부작으로 구성된 '비판자'는 편지와
대화, 퐁자와 강론 등의 형식과 우화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묘샤한 작품이다.
필립 국왕의 약속이 있은 후부터 나는 두 번 댜소 주교의 경고가 없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도대체 이
완고한 주교는 언제까지 나를 박해할 작정인가? 파라다씨는 교회의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판자 제2부'를 계속 집필하라고 권했다. 또한 많은

사제들과 수사들도, 누구는 돈을 벌라고, 또 누구는 신념을 버리지 말고 계속
책을 내라고 용기를 주었다. 나는 분초를 아껴가면서 계속 글을 써내려갔다.
눈이 따갑고 머리가 아프면, 친구 라스타노사 신부를 만났다. 신부와의 대화는

날로 악화되어 가는 세상 문제를 잠시 동안 잊게 해 주었다.
'페르디난드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칙령에 따라 세워진 이단
심문재판소가 항상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지금도 국외추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가톨릭 교도로서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알마타 함대가 굴욕적으로 대패한 사건은 아직도 국민들 마음 속에서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舊척의 전함과 15,000명의

젊은 해군병사들이 영국해협에 수장된 사건은 스페인 국민들에겐 참을 수 없는
통분이었다. 게다가 수년 전에는 일 세기를 끌어온 전쟁에서 허망하게도
네덜란드의 독럽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반기를

들고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국가가 빈사상태에 빠져도 민중들의 생활력은
꺾이지 않았다.
어느날 라스타노사 신부는 내게 사촌인 '마누엘 데 살리나스'씨를 소개해

주었다. 살리나스씨는 경건한 작가로 라틴어로 작품을 쓰고 있어 독자가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판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 라스타노사
신부가 외출했을 때는 살리나스씨가 나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살리나스씨와의 친교는 즐겁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불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작품에 경의를 표했으나 견해 차이가 있었다.
내 저서가 미덕과 악덕을 검증하고 처세를 논하고 있음에 반해, 그의 저서는

교회 상층부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살리나스씨의 견해에 의하면,
교회 지도자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하고 세속의 질서를 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나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대에 맞는 교육을 실시할 의무가 있다고 반론을 폈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 우리는 서로 서먹서먹해졌다. 나도, 살리나스씨도 우리

사이가 이런 지경에까지 와 있는 모습을 몹시 아쉬워하였다. 그 후론, 이따금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서로 아픈 부분의 화제를 피하였다. 서로의
사상에 너무 깊이 파고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1652년 새해 첫 손님은

파라다씨였다. 그는 처음 외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내 작품을 건네주며
기뻐하였다. 그것은 쉐힌튼경이 번역한 영어판 '영응'이었는데 표지도 그럴
듯하였다. 나는 너무나 흥분하여 그 귀증한 책이 어떻게 입수되었는지 조차 묻

지 못했다. 내 작품이 외국에서도 인정받았다는 현실에 새로운 힘을 얻어 나는
'비판자 제2부'를 서둘러 집필하였다. 어차피 모험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일부가 되고 싶었다. 후원자의 예측대려, 금서로 지정된 '비판자 제1부'는

뜻밖에 많은 독자를 얻었다. 그 중에는 저명한 종교극작가 '칼데론 데 라
파르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었다. 칼데론과 나는 이전부터 편지 왕래가 있었고 몇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1653년 봄 어느날 그는 나의 책을 코트 안에 감추고 몸소 나를 방문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교의에 어긋나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나와 대화하고 싶어했다.

이야기가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화제로 넘어가자, 그는 양 미간을 찌푸리며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의 진정한 방문 목적을 파악하게
되었다. 우리 새대의 가장 큰 오점인 도덕의 붕괴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실로
영응적이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동년배인 칼데론 데 라 파르카는. 어떤 경로가 되었든 대증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모두 신이 위임한 선지자들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 역시 흔신의 힘을 기울여 저작활동을 계속하라고 크게 격려하였다. 그
사람만큼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칼대론은 언젠가

발표한 희곡 안에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강론을 자주 하는 한 신부를 빗대어
비판하였다. 실제로 그 신부는 아주 오만했으나 교회 안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결국 칼대론은 명예훼손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법률에 밝은

그는 바로 석방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예수회 수사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이후에도 우리들은 6시간이 넘도록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한편, 이 시대의 병리를 진단하였다. 설사 이 비범한 인물이 방문하기

전까지는 내가 신앞에서 죄악을 범하고 이웃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손 치더라
도. 그가 방문한 그날만큼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에 대한 나의 신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또한 신의 순명에 대한 나의 자부심은 웅변으로 되살아 났고.

인본주의적인 신조를 세상에 펴고 도덕적 양식을 소생시키려는 나의 노력을
한층 배가하기로 다짐했다.
그가 방문한 날 이후로 나는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밤새도록 일만 하였다.

한번 가속도가 붙자, 더 이상 뒤로 물러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마지막 장을
정리하며서,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시 성찰하였다. 그동안 나는 사람이 본래의
자신을 찾기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뜻있는 인생을 쌓아올리려면, 자각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 왔다. 나날이 눈 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사태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찰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때 그때마다
중요한 가치를 저울질하는 능력이다. 건강한 생활을 보장하는 가치. 보다 큰

선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의 가치. 정신을 일신할 수 있는 가치. 항상 조심하고
위엄을 지킬 수 있는 가치. 믿고 의지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는 가치.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 맹목적으로 감사해 하지

않는 가치, 공치사를 잘 분별해 낼 수 있는 가치, 지나치게 사랑을 구걸하지
많을 수 있는 가치,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치. 험한 산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 낼 수 있는 가치, 기운이 솟아나고 되살아난 기억들을 추수리며

펜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