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자르 그라시안.

그라시안의 일곱 번째 회상

별관신사 2014. 8. 26. 04:07

-지성이란 인생에서 증요한 길잡이
오늘 아침은 웬지 온몸에 기운이 돋고 상쾌하다. 빨리 이 글을
탈고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내심 초조해진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황급기에 대한 회고록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1647년에 나는 '우에스카'에 왔다. 내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작가로 보나
설교자로 보나 인생의 성숙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창작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홀러 마치 하루가 2o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창작 의욕이 되살아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후원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 분은 나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돈 파블로 파라다'로, 이름도 매우 시적일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쉽게
친근감을 주는 자상한 용모를 갖고 있었다. 그는 이름있는 포르투칼 귀족으로
퇴역장교이기도 한데, 가족도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분의 도움으로 내 생활은 크게 변화하였다.
맨 처음 나를 후원해 주신 분은 정체불명의 수수께끼투성이의 한 신사였다.
나는 이 신사를 '세뇨르 도나도르'(기부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의

종이 왔을 때, 나는 내 강론에 공감한 한 친절한 노신사려니 했다. 그리고 단지
책의 출판을 어느 정도 후원해 줄 수 있겠거니 했다. 그 신사의 기부금은 수사
들의 생활비로 들어갔다. 수사들은 나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씬쇄해 주는

댓가로 생제비를 벌었다. 이 수수께끼같은 신사는 여러 해 동안이나 기부금을
보내 주었는데, 어느날 이 노신사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마지막까지 이 분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나의 인간주의적인 견해를 지지해

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파라다씨와의 협력관계는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우에스카에
살고 있던 그는. 주일 미사 때마다 나의 즉흥적인 강론에 흥미를 느키고 그

내용을 열심히 기록하였다. 그는 몇 달이 지난 다음, 직접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그 동안 메모했던 글에 '인생법칙'이란 제목을 달아 내게 전해 주면서.
보완을 해서 책으로 엮으라고 권했다. 비록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후원자 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피라다씨는 친절하게도 출자금까지 내놓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 글은 ' 계시와 처세술'( 이하 약칭 계시) 이라는

제목으로 1648년에 세상에 나왔다. 내 인생에서는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
처음 파라다씨는 '노렌죠 그라시안'이라는 필명에 대해 몹시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작가의 이름은 그다지 증요하지 않다고 그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그는
내 얘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만든 책은 대학과 교회 앞 가판대에서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인쇄 속도가 구입 희망자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구입 희망자들은 순번을 정해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지어 용케 책을 구입한 사람들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친구들을 불러 놓고 함께 독서회를 열어 밤새도록 토론을 하는 일도 흔히

일어났다. 처음 협력 관계가 결실을 맺자, 파라다씨와 나는 매우 기뻤다. 많은
예수회 수사들도 암암리에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의
성공은 몬트로 추기경에게 나를 더욱 의심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주교는 이

책을 '무방비한 민중들을 현혹시키는 무익한 책'이라고 비난하고 제본 증지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전쟁기간 동안 만났던 친우로 국왕 측근의 동생이었던 '돈 디에고 페리페 디

구스만'장군의 마음든든한 방문이 없었더라면, '계시'는 눈깜짝할 사이에
시증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장군은 이 책을 읽고 주교와 심한 입씨름을
했다고 귀뜀해 주었다. 게다가 장군은 내게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국왕 필럽 4세가 나와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고 싶으니, 입궐하라는 전갈이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초대는 전대미문한 것이었다. 나는 이를
즉석에서 받아들이고 이틀 후 웅장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수놓은 대궁전으로

안내되었다. 간소한 복장을 한 젊은 국왕은 일부러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친절하게 나를 반겼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팝은
이야기를 하였다. 키가 훤칠하고 늠름한 체구의 국왕은 젊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고 두뇌가 명석하였다. 특히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었던 국왕은 내게
자작시를 한줄 한줄 읽어 주면서 소감을 물었다. 더구나 놀람게도 그는 내가
7년 전에 발표하였던 '정치가' 라는 책을 소지하고 계셨다. 그것은 페르디난드

왕을 예찬한 글이었다. 이어 그 내용이 화제가 되었다. 필립국왕은 특히 어떻게
하면 완벽한 지배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나의 소견과 충언을 듣고 싶어
했다. 이 주제는 결코 내 쪽에서 먼저 들추어낸 것이 아니었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당시 나는 국왕에게 이렇게 대답한 걸로 기억한다.
'그러면 현재와 미래 세대에서 큰 스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폐하께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계시는군요"

국왕은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나의 생각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몇 시간이 흐르고 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자 국왕은 '계시'를
손에 들고 말씀하셨다.

'주교에게는 내가 잘 말해 놓겠소'
이렇게 해서 나는 긴 세월 동안 당해 온 압박과 위협으로 부터 해방되었다.
이 후에도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발표하여 비평가들과 민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나의 저작 의욕을 한층 고무시켜 준 것은 '계시'에 포함된 '인생의
법칙'에 대해 세인의 호기심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오후. 내가 막 강의를 끝냈을 때, 근처 교구의 젊은 신부가

찾아왔다. 그는 손에 '계시'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이 그 동안 자신이 풀지
못한 문제를 어느 정도 풀어 주었다고 실토했다. 거듭 그는 허영과
자기중심적인 편견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한테만

관심이 쏠려 있다는 괴로움이 심한 강박관념으로 자리잡아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이 신부를 다음 강의에 초대했다. 그리고 통상적인 강의
일정을 미루고 '계시' 가운데 있는 '자부심'이라는 항목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몇 시간을 걸쳐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었고 학생들은 점점 참신한
생각들을 끌어내었다. 젊은 신부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사물을 보게 되면서
자신의 고뇌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내게 고마워하면서 기쁜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로서도 상쾌한 하루였다. 이 작은 에피소드를 기록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자부심'의 경우와 같이 '계시' 가운데 있는 항목 하나를
주제로 하여,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토론을 시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지성이갈 인생의 여로에서 중요한
길잡이이다. 선택 방법을 놓고 무엇이 현명하고 무엇이 어리석은가를 분별하는
일은 때때로 협소한 사고영역에서 켜지는 작은 등불에 불과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현명한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생존의 열쇠이다.
질투를 하면 마음이 넉넉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른 답을 찾는 사람은 현명하다. 언제나 순리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현명하다, 대세에 휩쓸려가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은
현명하다. 야수의 본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현명하다. 진실을 밝힐 때를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정취가 우러나오는 마음이 몸에 밴 사람은 현명하다.

속이 알찬 사람을 돕는 사람은 현명하다. 마음을 가눌 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어리석은 자가 뒤로 미루는 일을 즉시 수행하는 사람은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