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당신과 나는 아무런 바깥의 영향 없이

별관신사 2015. 7. 5. 05:56

당신과 나는 아무런 바깥의 영향 없이, 아무 설득 없이, 형벌에 대한 공포
없이 우리들 속에, 우리의 존재의 핵심 속에 전적인 혁명, 심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경쟁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우며 질투하지 않게 되겠는지-말하자면 이러한 것을 포함한
그외의 모든 우리의 본성-이것이 우리가 그 속에서 나날의 삶을 사는 썩은 사회를 이룩하고
있거니와-의 현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는지?

내가 지금 철학이나 관념의 신학적 구조 또는 신학적 개념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바보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나날의 삶 속에서, 내적,

외적으로, 실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일이다. 만일 당신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검토한다면, 그것은 지적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인데, 지성이란 실존의 전역이 아니다. 즉 그것은 하나의 조각이며, 조각이란, 그것이

아무리 영리하게 결합되어 있고 아무리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실존의
부분인데 비해, 우리는 삶의 전체성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외적 과정도 내적 과정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즉 단 하나의 과정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완전히 전체적인 운동으로서, 내적
운동은 스스로를 외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외적 반작용은 다시 내적인 것에 작용한다.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보는

법을 알면, 그 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며, 그리고 보는 일은 아무 철학도
선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냥 보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이 모든 그림(사태)을 봄으로써,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봄으로써 당신
자신을 쉽게, 자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정신에 완전한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아마 당신은 <나는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할는지 모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직한데, 특히 사회적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돼 있는 사람들이나 독단적 신념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과 사물의 있는 바 그대로에 만족하거나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바라지 않음직하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관심할 바 아니다. 또 당신은 <그렇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고, 나한테는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좀더 교묘하게 말할는지도

모르는데, 이 경우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을 봉쇄한 것이 될 터이고, 질문하는 일을 그친
셈이 될 터이며, 이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는데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또 <나는 나자신 속에서의 근본적인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알지만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는가?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고, 그리로 향하도록 나를 도와달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변화 자체가 아니다. 즉 당신은
기본적인 혁명에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다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어떤 방법이나 체계를 찾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체계를 줄 만큼 바보스럽고 또 당신이 그것을 따를 만큼
바보스럽다면, 당신은 다만 베끼고, 모방하고,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따름이며,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 속에 다른 권위를 세우는 셈이 되며, 그럼으로써 당신은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며 그렇지만 그걸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체계와 마찰하는 당신 자신의 독특한 의향, 경향 및 억압들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거기엔 모순이 있게 된다. 그래서 당신은 그 체계의 이데올로기와 나날의 실존의
현실성 사이에서 이중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려고 하면서 당신은

자신을 억압하는데-실은 정말 참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 따라 자신을 탐구한다면 당신은 항상 이차적인 중고 인간에
머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