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인간과 같은 복잡한 존재의 건강은 주로 온갖 나쁜 영향에 대한
저항 즉 일부는 육체적인, 일부는 정신적인 반작용에 의해서 유지된다.
더우기 이와 같은 나쁜 영향은 어떠한 예방책을 가지고서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신과 육체를 훈련하고 강화하여,
그로써 온갖 악영향에 저항하고, 그뿐만 아니라 이 싸움에서 상처를
입는 일이 없이 오히려 저항력을 증강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건강법 중에서 가장 좋고 가장 손쉬운 것은 신의 명령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을 지키면 고령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생명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의 신의 약속이다.
건강을 위해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오직 향락만을 쫓는 생활 습관이며,
그것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좋지 못하다. 특히 그것이 어떤
일정한 방향에 고정된 향락 생활이라면 그 보답으로서 정신과 육체에 반드시
저주가 찾아온다. 이처럼 올바른 견해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현대인들은
이 진리를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으로써 통절하게 경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을 구제할 수 있는 의학적인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불행한 경우가 그에 결부되거나 혹은
집요한 탐구 벽이나, 지나치게 한가한 생활 등이 겹치거나 하면 - 특히
시인이나 예술가나 철학자와 같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러한데 - 우울증이나 나아가서는 정신 착란증까지 일으키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병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원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 그와 같은 병의 유전적 소질이 있었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생활 방법이나 윤리적 세계 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앙으로써 그에
대항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이라 할 수 있는
<유전적 요소>에 대한 공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것은 유물론적인 정신 활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그에 대한 벌로서, 단순한 의학적 방법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환자나 또는 몸이 쇠약하여 안정과 섭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중요하면서도 소홀하게 넘겨 버리는 문제는
사람과의 교제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건 간에 좋지 못한 사귐은, 이를테면
요양소에서 정해진 일과로 되어 있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시시한 대화마저도,
그것은 나쁜 공기와 마찬가지로 쇠약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해롭다.
반대로 좋은 사귐, 특히 평화로운 사귐은 병의 회복을 위해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평화>라는 것은 확실히 실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몸에 지니고서, 타인을 쾌적하게 하는 분위기처럼, 도처에 운반해 가는 하나의
현실적인 성질, 또는 힘이다. 그런데 그 반면, 훌륭한 재능을 가졌고,
부도덕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신앙심이 깊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끼여들면 그 자리가 반드시 불안과 불유쾌로 가득 차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금방 사람들에게 눈치채이는 것으로, 특히 어린아이나
동물은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는 본능마저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어른들은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거나, 지나친 반성 때문에 그 본능을 상실하고
있는 수가 있다. 그런데 환자의 경우는 그것이 왕왕 되살아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환자의 간호를 맡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족들이나
문병객들도 반드시 주의해 두어야 할 일이다. 또 표면상의 경전(이를테면
집사나 여집사에게서 볼 수 있는)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거기에다 오로지
사명에 사는 참으로 동정심이 깊고 봉사 정신이 높은 상냥한 마음씨와
참된 신앙에서 우러난 즐거운 성품이 있어야만 한다 간호하는 사람의
마음의 독선이나, 내키지 않는 시중이나 ,사람을 판가름하는 따끔함 등이
바늘 끝만큼이라도 환자의 기분을 움추러 들게 하고 병의 회복을 어렵게
만들며,
그 마음을 위로의 바탕으로부터 외면하게 한다.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일부 의사에게서 볼 수 있는 사명감과 정신적 적성의 결핍이
오늘날의 의학의 기술적 진보를 저지하는 커다란 장애가 되어 있다.
(마가복음 9:28-29는 분명 환자가 아니라, 의사와 간호원을 가리키고 있다.
실로 많은 것이 의사와 간호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오늘날 종종 듣는
불평이지만, 그들 가운데는 자신에게 부과된 혼자에 대한 매일 매일의
필수적인 임무를 신앙생활을 구실로 등한히 하는 자가 있다고들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명해진 것도 아닌 종교상의 봉사에 힘쓰기 위해 환자에게
필요한 시중드는 일을 게을리 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아무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그 입법자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한 자연법칙의 배후에는 그 바탕을 이루는 윤리적 세계
질서의 법칙들도 불원간 다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자연 과학자들도 불원간 다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바르지
못한 생활에서는 결코 건강이 생겨날 수 없다. 도덕적인 치유력과 그 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외적인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설사 그것이
가장 뛰어난 방법일지라도 건강을 유지하거나 전적 인자를 가지고 있지만,
올바른 방법을 쓰면 누구나 치유될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아주 불치의
환자라도 적어도 그 병고를 현저히 경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각 기관의 많은
질환들은 요컨대, 오늘날 신경과만이라든다. 신경쇠약이라 불리고 있는 전반적인
병약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병의 뿌리가 치유되면 그러한 병들도 저절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나 병약 그 자체는 육체적 치료 방법만으로는
완치할 수가 없다. 이에는 반드시 정신적 요소의 협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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