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왜 불면이 생기는가를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불면은 대개 병이나

별관신사 2014. 2. 28. 08:29

왜 불면이 생기는가를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불면은 대개 병이나
걱정되는 일이나 불안한 생각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휴식, 안일한 생활방법, 갖가지 무절제 ,혹은 긴 시간의 낮잠 등으로 해서

오는 수도 있다. 도대체 잠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미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성과 없는 연구나 논쟁 범위를
당분간은 벗어날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경험상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면이 필요하며, 병 특히 신경 계통
질환의 경우에는 수면이 가장 좋은 치료수단이라는 것, 또 수면은 밤에,
그것도 자정 전부터 시작하여 6시간 내지 8시간 동안 깨지 않고 계속

자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는 것, 그리고 인공적인 수면제는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불면은 고역이므로 가능한 한 제거해야만 한다.
다만 그 불면이 몹시 큰 내적인 기쁨에서 생겼을 때나(이때는 잠 안 오는 것이

오히려 인생 최대의 기쁨의 하나이다.) 혹은 평소에는 게을리 하기 쉬운
자기 반성의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갖기 위해 불면을 초래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이 후자의 경우, 불면은 특히 내적 생활의 큰 진보를

이룩하고 인생의 가장 값진 보배를 손에 넣기 위해 경시해서는 안 될 귀중한
기회이다. 잠 안 오는 밤에 자기 생애의 결정적인 통찰이나 결단을 발견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면의 문제를 고찰하더라도 조금도

지장이 없으리라. 이스라엘의 현인 카히나이의 아들 랍비 카니나는
<밤에 깨어 있을 때나 홀로 길을 걷고 있을 때에 안일한 생각에 마음을
내 맡기는 자는 자기 심령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즉 그런 사람은 정신상의 큰 이익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놓칠 뿐 아니라 무익한 상념이 따르기 쉬운 위험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 안 오는 밤까지도 역시

<신이 주신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올바른 태도 일 것이다.
잠 안 오는 밤은 활용되어야 할 것이지, 무턱대고 거역할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불면에도 뭔가 목적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러한 때야말로 평소보다 똑똑히 들리는
그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일체의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왜 이 불면의 밤이 내게 찾아든 것일까>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욥기가
분명히, 깊은 경험에 입각해서 말해주고 있다. 불면의 이같은 목적을 발견하면
그와 동시에 불면 그 자체도 고칠수가 있다. 즉 그로써 영혼의 평안히 찾아오고,

그것이 다시 몸의 각 기관, 특히 신경에 좋은 작용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또 다음 사실에 주의해야만 한다. 잠 못 이룰 때에 그저 쓸데없이
자기 생각에 몸을 내맡기고, 다시 말하면 자기라는 쪽배를 상념의 물결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은 좋지 못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상좌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체로 불안을 증대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항상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시는 신과 이야기하던가, 아니면

당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도록 하라. 특히 성실한 여성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사람들의 말이나 손은 종종 크나큰
위안을 준다. 그와 같은 구원이 얻어지지 않을 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좋은 책이다. 그보다도 오히려 그러한 책의 아주 짧은 한 구절이라도 좋다.
그것이 사고에 자극을 주어, 정신을 다른 번뇌의 상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올바른 위안의 오아시스로 향하게 한다. 이런 뜻에서의

가장 좋은 책은 구약의 시편, 신약 가운데의 그리스도의 말씀, 욥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어떤 찬미가 등이다. 그러한 찬미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동포교회의

찬송가집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좋은 사상은 반드시 스스로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그것들과 접촉할 기회와 좋은 자극을 주자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잠 안 오는 밤에 알맞은 사상, 게다가

대개 그 자체가 안 오는 밤의 결실로 생긴 사상만이 모아져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을 조용히 사색하는 것이 목적에
가장 잘 맞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이 제아무리 마음을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진실성과 진면목이 대낮에 검토해서
수긍될 수 없는 그런 공상적인 요소를 조금이라도 내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종류의 책은 극히 드물다. 어느 정도 그 역할을

대신해 주어야 할 아주 유명한 기도의 말씀조차도 반드시 그 경우의 요구에
합당하다고만 은 할 수 없다. 심지어는 <주기도문>조차도 온갖 고난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주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그밖에 기도만큼 직접적인 힘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때의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러한 다른
기도 쪽이 때로는 더 적합하고, 그때마다 효과를 갖는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이나 환자와 함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유념해 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가끔 자기 임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들은 잠 못 이루는 환자를
그 번민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여, 쓸데없는 과거의 추억이나 장래에 대한

기우로부터 조용히 마음을 돌이켜 주고, 그리고 가능하면 그들의 정신을
도와서, 기꺼이 깨어 있고 싶어지는 그런 위대한 기쁜 이념으로 비약하도록
인도해 주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특히

기쁨의 마음이다. 그 밖의 면에서는 우수한 사람들까지도 기쁨의 마음이
없다. 게다가 그들에게 그 진정한 이유를 솔직하게 지적해 주기가 곤란하다.
그들은 그것을 항상 오해하기 때문이다. 기쁨의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자애심이나 아집이나 혹은 고상하거나 또는 천한 종류의 나태이다.
신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야말로 기쁨을 얻는 조건이다. 기쁨의 마음은 신에게
순종한다는 거짓 없는 증거이며, 그것은 누구나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의 은혜와 신의 재림을 확실히 깨달을 때의 이 기쁨은 병고에 신음하고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도 왕왕 돌연히, 게다가 아주 강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다.
그 때문에 모든 괴로움, 특히 전혀 예사로와지고, 그리고 평소의 병상 생활과는

거의 하등 관계도 없는 전혀 딴 생활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느낀다. 그것을
경험한 일이 없는 사람은 실제로 믿기 어렵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산 증인이
많이 있다. 장래의 의학까지도 언젠가는 치료 목적 때문에 이 기쁨의 감정의

도움을 구하고, 또 병의 심리적 요소에 대해서도 단지 육체적인 면만을 고려한
기계적인 치료 방법에 못지 않은 치료 효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현대 의학은 몸 전체를 강화하고, 그 생명력을 높이는 것이 병에 걸린

각 기관의 -이를테면 폐 등의 - 회복을 꾀하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의학은 내적 인간의 강화라고 하는 것에도 힘을 빌게 되고,
또 어떤 현대의 의사가 <은총의 작용>이라고 이름 붙인 것, 즉 병의 회복에

보다 강력한 힘이 작용하리라는 가능성까지도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학이라는 존귀한 기술이 인간의 정신을 죽이는 유물론으로부터 비로소
빠져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실로 반세기 이래로 환자들로부터 의술에 대한

신용을 더욱더 빼앗게 한 것은 바로 이 유물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