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언급한 바로써 적어도, 불면과 그 윈인이 되기 쉬운 병까지도 반드시

별관신사 2014. 2. 28. 08:30

언급한 바로써 적어도, 불면과 그 윈인이 되기 쉬운 병까지도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일단 이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불면을 어떻게 방지하느냐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독일

시인이 말했듯이, <밤은 천상의 것이며, 신의 기적이다. 그러나 특히 아름다운
밤은 깊은 잠 속에 보내진 밤>이기 때문이다. 원칙으로도 또 일반적으로도
이 말은 그대로 통한다. 불면을 피하는 에 중요한 것은, 첫째로 흥분이나

불안의 씨가 될 만한 생각을 품지 않고, 가능한 한 조용하고 좋은 사상과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밤의 휴식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수면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 취침 전에 무언가

가벼운 일을 하는 것이 좋을까, 다정한 대화가 좋을까,그보다도무언가 좋은
독서(단, 신문을 읽는 것보다는 좀 나은 읽을거리)가 좋을까. 그것을 그 사람의
개성에 따를 것이리라. 다만 확실한 것은, 대단한 사색을 요하는 극히 진지한

일이나. 밤늦도록 해야 하는 일이나, 또 정신을 많이 쓰는 일, 특히 계산이라든가
그에 준하는 일은 취침을 방해하는 것으로 과음이나 과식,또는 무의미한 잡담을
수반하는 흔해빠진 사교나 연극 관람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런 것들은 머리를

몹시 흥분시키기 쉬우므로 수면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의약품으로 만들어진
수면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예외 없이 인체에 해롭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의사와 상의하고 나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심지어

알콜음료까지도 거기에 첨가하고 싶다. 한편 지나치게 배부른 경우만이
아니라, 지나치게 배고픈 경우도 또한 왕왕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 아무리
해도 잠을 못 이룰 때는, 불을 켜고 잠시 일어나 있고, 가능하면 뭔가 소화되기

쉬운 가벼운 음식을 섭취하고, 마음을 좀 가라앉힌 다음 다시 눕는 것이
일반적으로 썩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편안한 잠을 얻는 최상의 방법은, 흔히
선량한 행위, 확고한 좋은 계획, 참회, 개심, 타인과의 화해, 장래의 생활에

대한 또렷한 결심 등이다. 이런 것들은 특히 신경을 가라앉혀 주는 것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분노나 증오, 질투나 걱정 등의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수면에 좋다 그와 같은 초조한 생각들은 아무런 득도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밤의 어둠 속에서는 가장 좋지 못하다, <밤의 어둠은 인간의 벗이 아니다>라고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말한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밤의 암흑 속에서는
모든 어려움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새로운 힘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날의

아침의 햇빛 속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답답하게 보이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첫째 불면증이 현재의 병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닌 경우에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병에 의한 불면의 경우에도, 이미 말했듯이 정신의

기분을 높이고, 강화함으로써 병의 치유 그 자체가 용이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점을 종전보다도 한층 깊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장래에
반드시 진실로써 증명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적 조력은 불가결한 것으로써

환자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연의 치유력이 외부로부터의 예술적 조력을
맞아들이도록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힘이 내부에 없을 경우에는
<기력을 집중>하도록 하려고 하거나 격려하더라도 이 힘은 솟아나지 않으며,

또 일 상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철학이나 정신적 교양에 의해서도
이 힘은 얻을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철학이나 교양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한 무력을 느끼는 순간 전혀 쓸모 없이 되어

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한 힘을 얻으려면 오직 우리들의 밖에 있는 어떤 힘
<그것은 무진장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에게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접근하고, 움직일 수 없는 신뢰를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 이 위대한

힘이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또 인간의 정신에 탄력성과 마음의
기쁨까지도
줄 수가 있다. 이로써 육체의 병이 정복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경감될 수는

있는 것이다. 흔히 있듯이, 그러한 병이 그 사람의 정신적,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결함에서 직접 생긴 것일 경우, 위에서 말한 것은 한층 진실이다.
특히 신경 질환이나 초기의 정신병과 같이 매우 복잡하여 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분명한 영역에 있어서는, 적어도 우리들의 생각으로 볼 때,
치료의 임무는 육체에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 정신적
원인을 규명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 오늘날에도 아직 이루어지고 있는

<기적적>치료 등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착각이라든가
자기기만이라고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 무릇 인간의 정신이 매우 강화되어,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드디어는 도덕적 부정을 육체적 불쾌, 혐오감, 신경의

쇠약으로 느끼며, 반대로 진정한 선행을 육체의 힘이나 원기, 두뇌의 명석,
조용한 심장의 고동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이것은 인생의 올바른
길을 나아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육체는 정신의 진정한

종복이 되고 받침대가 되어, 정신의 작용을 방해하기는커녕 이를 돕는 것이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약함에 대하여 인간은 오히려 신에게 감사하고, 올바른
길에 있어서 그 치유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병의 보다 높은 목적을

멋대로 오해하여 병에 내포되어 있는 경고나 요청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외적 방법에 의해서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념이 이른바
<기도 치료원>의 바탕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자칫하면 바르게 실행되지

않는 수가 많다. 또 일반적으로 그렇나 생각을 행하는 데 결코 특별한 장소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어떤 집이라도 신이 깃들 수 있는 장소라면 그에
적합하다. 마치 성안에 살듯이, 신의 안에 거하여 결코 방황해 나오지 말 것.

날마다 눈뜨고 있는 동안은 늘 뭔가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며,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굳게, 더욱더 굳게 신을 신뢰할 것-이것이 인간의 완성에의,
또 동시에 건강에의 한 치의 착오도 없는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을 젊은 시절부터

외곬으로 끊임없이 걷는 사람은, 시에나의 성녀 카탈리나(이탈리아의
도미니크파의 수녀, 묵상과 봉사의 생애를 보냈다.)처럼 젊어서 위대한 완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녀가 이미 33세로 그 지상의 인생 행로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이와 같은 진실한 지혜에
이르는 단호한 의지, 그리고 다른 일체를 물리치는 결의를 그렇게 일찍부터
품는 일이 없다. 게다가 또 오늘날에 와서는 그와 같은 아주 올바른 지도를

얻기도 좀처럼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그 생애의 마지막에 비로소 이 똑바른
구원의 기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 길에도 역시 많은 사도가 교차되어 그것을
방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