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텅 빈 그릇이니
그것은 퍼내도 다하는 일이 없고
헤아릴 수도 없도다.
그것은 하나의 텅 빔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것에서 솟아 나오고
거기로 되돌아 간다.
그 속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그것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다하는 일이 없다.
당신들은 0의 개념이 인도에서 발명되고 발전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도는 모든것이 무에서 0에서 나오고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여행의 전체는 0에서 0에로의 여행이다.
그래서 인도는 0의 개념 "순냐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수학 전체의 기초가 되었다.
0은 수학전체의 기초이다.
만일 0이 제거되어 버린다면 수학의 구조 전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그 게임 전체가 0에 달려있다.
수학의 1에 0을 붙이면 거기서는 0이 9의 값을 가진다
왜냐하면 1은 즉이 10이 되기 때문이다.
9가 0속에서 즉시 태아난다.
1에 두개의 0을 붙이면 그 가치는 99이다.
즉시 1은 100이 되었다.
0 속에서 그 구조 전체가 세워진다
0 없이는 수학은 사라져 없어진다.
그리고 수학 없이는 과학 전체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0이야 말로
모든 수학과 그리고 모든 과학의 근거이다.
0의 개념없이 아인슈타인을 생각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0의 개념을 없애버리면 모든 컴퓨터는 모두 정지해
버릴 것이다. 0 없이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0은 이 세계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으로도 보인다
그 0은 무엇인가?
0은 단지 0이다.
무(無)인 것이다.
그것은 다 사용할 수가 없다.
당신은 거기에서 좋은 만큼 많은것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그것은 9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99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999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것이라도 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닥이 없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다.
1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고정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2는 한정되어 있다.
9까지의 모든 숫자는 모두 한정되어 있다.
다만 0만이 무한의 현상이다.
실제로 9개의 숫자는 0 없이는 작용할 수 없다.
그것들은 0에서 나온다.
0에서 성장한다.
이 전 존재는 0 하나의 텅 빔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 이토록 텅 빔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것은 철학적인 교리는 아니다
기억해두기 바란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비유이다.
노자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다.
노자는 당신들에게 텅비지 않는 한 당신들은 괴로울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텅 빔이야 말로 당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현실에서는 당신은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명상의 의미기도 하다.
텅 비는 것 하나의 생각조차도 펄럭이지 않는다.
알맹이가 없는 오직 공간.
돌연 불행은 사라져 있다.
왜나하면 불행이라는 것은 사고 속에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도 사라져 있다.
죽음은 사고(思考)속에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도 사라져 있다.
그 하중 전체도 사고를 통하여 운반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야망도 사라져 있다.
그도 그럴것이 어떻게 사고없이 야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고 없이 미칠 수 있겠는가?
사고 없는 광인들은 본 적이 있는가?
실재로 광인이 광인인것은 그가 너무나 많은 사고를 갖고
있고 게다가 그 사고들을 종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인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것이 광인의 문제인 것이다.
오쇼의 노자 강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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