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르쉬

라마나 마하르쉬.

별관신사 2013. 4. 3. 08:23

때는 1896년, 열 일곱 살의 한 소년이 내적인 충동에 이끌려 자기 집을 나와,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남인도의 성산(聖山) 아루나찰라(Arunachala)를 향해 천천히 여행길에 올랐다. 아루나찰라에 도착

한 그는 몸에 지니고 있던 돈과 소지품 등을 다 내버리고 그가 최근에 얻은 깨달음, 즉 그의 참된 성품은 무형의 내재적인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자각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이 자각

속으로의 몰입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는 자신의 몸뚱이와 바깥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앉아 있는 그의 두 다리는 곤충들이 갉아먹어 들어갔고(이는 그가 아루나찰레스와라 사원의 지하실에서 삼매

에 들었던 처음 얼마 동안의 일이다), 음식을 먹을 정도의 의식이 거의 없었으므로 육신은 야윌 대로 야위고 모발과 손톱은 자랄 대로 자랐다.

이런 상태로 2, 3년이 흐른 뒤에야 그의 몸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정상 상태를 되찾기까지는 몇 해가 걸렸다. 그러나 자기가 (순수) 의식이라는 그의 자각은 이러한 신체

적 변화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그 후 평생 동안 변함이 없었다. 힌두적 표현으로 그는 '진아(眞我)를 깨달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의 불가분하고 보

편적인 의식이 있어 이 의식과 분리되어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이 의식은 드러나지 않은 모습으로는 존재(beingness) 또는 자각(awareness)으로서 체험되고, 드러난 모습으로는 이 우주

의 삼라만상으로 나타난다는 진리를 그의 직접적인 체험으로써 깨달았던 것이다.

보통 이러한 자각은 오래 열심히 수행한 끝에나 얻어지는 것이지만, 이 소년의 경우에는 아무런 노력이나 바램없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소년 웬까따라만(Venkataraman)은 마두라이

(Madurai, 인도 남부의 도시)에 있는 숙부 댁의 이층 방에 혼자 있었는데, 갑자기 강한 죽음의 공포가 그를 엄습해왔다. 그는 몇 분 동안 마치 실제로 죽어 가는 사람 같은 시늉을 해보았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참된 성품은 결코 죽지 않으며, 그것은 그의 육신이나 마음 그리고 인격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한 의식 속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뜻밖의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

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체험은 거의 다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웬까따라만의 경우 그 체험은 영속적이었으며 그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한 사람의 개인적 존재

라는 의식은 그에게서 완전히 사라져 두 번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깨달음 이후 웬까따라만은 자신의 체험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달포 동안 평범한 소년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이같이 자신을 숨기고 생활하기가 점차 힘들어짐을 느낀 그는 6주일 후, 마침

내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곧장 아루나찰라 산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가 아루나찰라 산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아루나찰라가 신(神)과 관련이 있는 이름인 줄로 알고 있다가, 어

느 땐가 그것이 어떤 천상의 영역이 아니라 지상에 실재하는 산임을 알고 매우 놀랐다. 힌두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Siva)신의 화현((化現)으로 간주해 왔으며, 웬까따라만도 훗날 자신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바로 이 아루나찰라 산의 영적인 힘이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는 아루나찰라 산을 너무나 사랑하여 1895년 그가 입산한 날로부터 1950년에 입적할 때까지, 누가 아무리 권유해도 이 산의 기슭에서 2마일 밖을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 산에서 몇 해를 지낸 뒤부터 그의 내적인 깨달음은 외적으로도 영적인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여 주변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그가 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초기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이 젊은이의 성자다운 면모와 깊은 지혜에 감명을 받고, 그에게 브하가완 스리 라마나 마하르쉬(Bhagavan Sri Ramana Maharshi)라는 존칭을 붙였

다. 브하가완은 주(主, Lord) 또는 신(God)이란 뜻이고, 스리는 인도인들이 쓰는 경칭이며, 라마나는 벵카타라만을 줄여 부른 것이고, 마하리쉬는 산스끄리뜨어로 대각자(大覺者, great seer)를 의

미한다. 이 호칭은 그를 따르던 다른 이들도 모두 좋아했으므로 그때부터 그는 이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무렵 스리 라마나는 말을 아주 적게 했으므로 그의 가르침은 특이한 방식으로 전수되었다. 즉 말로 가르치는 대신 어떤 침묵의 힘을 끊임없이 방출함으로써 거기에 심금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의 마

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으며, 이렇게 해서 때로는 그 자신이 항상 잠겨있는 깨달음의 상태를 그들이 직접 체험하게 하기도 하였다 후년에는 구두로도 가르치기를 많이 했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침묵

의 가르침(silent teachings)은 누구든지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받을 수 있었다. 스리 라마나는 그가 방출하는 이 침묵의 힘이야말로, 자신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며 응집된 형태라고 그의 전 생

애를 통해 강조하였다. 이 가르침의 중요성은, 그가 자신의 구두 가르침은 단지 그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자주 말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그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났으며(그의 헌신자들에 의해 1916년에 스깐드 아쉬람이, 1922년 이후에는 라마나스라맘이 아쉬람으로 건립되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생애 중 마지막 20여 년간은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성자로 널리 인정되었다.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끼게 되는 평화로움에 이끌려 온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구도자들을 지도하고 경전 등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권위가 있다고 여겼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단지 자신

들의 문제를 하소연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어떤 이유로 찾아온 사람이든 간에, 그와 접촉해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단순함과 겸손함에 감명 받았다.

그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아쉬람의 대중방(communal hall)에서 기거함으로써, 방문객들이 하루 24시간 언제든지 그를 친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의 소유물이라고는 샅가리개(loincloth) 하나, 물

주전자 하나, 그리고 지팡이 하나가 전부였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받드는 것을 거부했고, 아쉬람의 전 대중이 골고루 나

누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어떤 물건도 받지 않았다. 그는 아쉬람의 대중 운력(communal work)에 같이 참여했으며, 여러 해 동안 아쉬람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곤 했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그의 평등 의식(sense of equality)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누구든지 그를 찾아오면, 그가 중요인사든 농사꾼이든 아니면 동물이든 간에, 그는 모든 이를 똑같이 존중하고 배

려하였다. 그는 나무나 풀까지도 이처럼 평등하게 대하여 사람들이 꽃이나 잎사귀를 함부로 따지 말도록 했으며, 아쉬람의 나무에서 과일을 딸 때에도 언제나 그 나무가 가장 고통을 적게 느낄 그러한 방법으로 따라고 할 정도였다.

이 기간(1925-50) 동안 아쉬람의 생활은 스리 라마나가 기거하면서 사람들을 접견한 작은 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이 방의 한쪽 구석에 앉아, 세계 도처에서 그를 찾

아 쉴새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의 온갖 질문에 답하면서 동시에 그의 침묵의 힘을 끊임없이 방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이 기간 동안(이때가 그의 생애 중 그

의 가르침이 가장 잘 기록된 때이다) 그가 구두로 한 답변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가르침들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구두 가르침들은 의식(consciousness)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실체라는 그의 직접적인 깨달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권위 있는 말씀들이었다. 결국 그의 모든 설명과 교시(instructions,구체적인

조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의식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본래적 상태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희석되지 않은 형태의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극

히 적었으므로,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이해력에 맞추어 설명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는 여러 층의 상이한 수준들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에서 말할 때, 그는 의식만이 실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이 진리에 대한 자각이, 자신을 한계 지우는(self-limiting) 마음의 관념에 의

해 가려지며, 이 관념을 버리기만 하면 실체인 의식이 자연히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수준 높은 설명이 너무 이론적이라고 느꼈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을 에고

로 한정하는 관념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스리 라마나는 이들에게, 오랫동안 수행을 해야만 실체인 이 의식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

람들을 위해서 그는 그 자신이 자기탐구(self-inquiry)라고 부른, 하나의 혁신적인 자기주시의 수행법을 내놓았다. 그는 이 방법을 워낙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권유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 수행법을 그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로 간주하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수행법들에 대해 계속 물어왔고, 더러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그와 논쟁을 벌이려고 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스리 라마

나는 절대적 진리의 관점을 잠시 접어두고 질문의 수준에 상응하는 적절한 답변을 하곤 했다. 이러한 경우에 질문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관념들의 많은 부분을 그가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의 관심을 당신의 가르침의 어떤 측면으로 끌어들여서 그들이 당신의 진정한 견해를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여러 수준의 사람들에게 맞추어 가면서 한 그의

가르침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한테는 개인적 자아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말하고, 또 다른 사람한테는 개인적 자아가 어떻게 작용하며

어떻게 업(karma)을 쌓아 윤회하게 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제3자로서는, 이러한 두 가지 진술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리 라마나 자신의 체험에 입각한 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진술이 분명히 더 타당한 것이다. 의식만이 실재한다는 그의 말로 압축되는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다양하고 상호 모

순적인 그의 가르침들의 상대적 진리성을 실제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최종적인 잣대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답변이 이 관점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났느냐에 따라 그것의 진리성은 그만큼 희석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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