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르쉬

마하르쉬.

별관신사 2013. 4. 11. 08:08

해제(解題)

명상을 하다 보면 때때로 놀라운 현상을 체험할 수가 있다. 즉, 신들의 환영(幻影)이 나타나기도 하고, 투시력(천리안)이나 텔레파시와 같은 초자연적 능력이 개발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현상(환영과 초능력)은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다. 환영은 어떤 심상에 집중할 때, 특히 헌신의 마음으로 집중하거나 그러한 환영이 나타나기를 강하게 바라면 때때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능력은 특수한 요가 수행에 의해 얻을 수 있다. 요가의 고전인 빠딴잘리의 <요가경>에는 은신술에서부터 물 위를 걷는 것까지 여덟 가지 초능력의 개발을 촉진하는 몇 가지 수련법이 열거되어 있다.

스리 라마나는 환영이나 초능력은 마음의 산물로서 진아 깨달음을 돕기보다는 장애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헌신자들이 그것을 일부러 추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때때로 만약 환영이 저절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수행이 진전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일 수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는 그것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시적 체험일 뿐이며 '깨달음의 차원보다는 아래'에 있다는 점을 보통 덧붙이곤 했다.

만일 초능력이 저절로 나타날 경우에 그는 수행자가 거기에 집착하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그러한 능력들은 에고를 없애기보다는 더 키운다고 설명했고, 또한 초능력을 얻고자 하는 욕구와 진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서로 배타적임을 강조하였다.

"진아는 가장 친숙하면서도 영원한 존재이지만 초능력은 낯섭니다. 초능력은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지만 진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능력들은 끊임없이 긴장해 있는 마음으로써 추구해야 하지만, 진아는 마음이 소멸되었을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초능력은 에고가 있을 때만 나타납니다. 진아는 에고를 넘어서 있으며 에고가 사라진 뒤에야 깨달아집니다."

1.환영에 집착하지 말라

저는 전에 한 번 스리 바가반께, 제가 힌두교로 개종할 무렵 어떻게 쉬바의 환영을 보았는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체험이 꾸르딸람에서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영들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큰 지복감을 안겨줍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쉬바가 없다면 제 주위에서 무엇을 보아도 아무런 생기가 없습니다. 저는 그를 생각하면 그저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의 환영이 저에게 영원히 지속될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는 쉬바의 환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환영이란 항상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영의 가치는 그것을 보는 자의 가치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서, 환영의 본질은 보는 자의 그것과 같은 차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난다는 것은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뭐든지 나타난 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환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쉬바는 영원합니다.

환영은 그것을 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보는 자는 자기(진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의식인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으며, 보는 자가 의식과 별개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 의식이 영원한 존재이며 유일한 존재입니다.

보는 자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환영을 볼 때처럼 자기 눈으로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기의 존재를 부인합니까? 아닙니다. 따라서 직접 체험이란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가 쉬바입니다. 그가 없이는 다른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일체 만물이 그의 존재를 쉬바 안에서, 그리고 쉬바로 인해서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십시오.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아 진아로 안주하십시오. 그것이 존재로서의 쉬바입니다. 그의 환영이 자꾸 나타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대가 보는 대상들과 쉬바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는 주체이며 동시에 대상입니다.

그대는 쉬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쉬바는 지금 여기 항상 깨달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은 아직 쉬바를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이 쉬바를 깨닫는 데 있어서 장애인 것입니다. 그 생각조차 놓아 버리면 깨달음이 거기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제가 그것을 가능한 빨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깨달음의 장애입니다. 쉬바 없이 개인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지금도 쉬바가 곧 그대입니다. 시간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만약 깨달음 아님의 순간이 존재한다면, 깨달음의 문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대는 쉬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깨달아져 있고, 항상 깨달아져 있으며, 결코 깨닫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2,사물은 그것을 보는 자의 생태이다

저는 슈리 끄리슈나에 대한 직접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그것을 얻으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는 슈리 끄리슈나가 뭐라고 생각하며, 직접 깨달음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브린다반에 사셨던 그 슈리 끄리슈나 말입니다. 저는 고삐들(gopis -그의 여성 헌신자들)이 그를 보았듯이 그를 직접 보고 싶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대는 그가 한 사람의 인간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며,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존재들(all beings)의 심장 속에 있다. 나는 모든 생명 있는 형상들의 처음이요, 중간이며, 끝이다'(<기따>, 10:20. 또한 307쪽 참조).

그는 모든 존재들의 내면에 있듯이, 분명히 그대의 내면에 있습니다. 그는 그대 자신, 혹은 그대 자신의 진아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대가 이 실체[진아]를 보거나 그것의 직접 깨달음을 얻으면, 그대는 끄리슈나에 대한 직접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아에 대한 직접 깨달음과 끄리슈나에 대한 직접 깨달음은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대 자신의 방식대로 해 나가려면, 끄리슈나에게 완전히 순복하여, 그대가 원하는 직접 깨달음을 그가 하사해 주도록 맡기십시오.

스리 라마끄리슈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이슈와라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이슈와라에게 왜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일이 왜 저희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마음이 순수하고 강해야 하며, 명상 수행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신이 나타납니까?

그러한 나툼[顯現]은 그대 자신이 실재하는 만큼이나 실재적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대가 생시의 상태에서처럼 그대 자신을 육체(거친 몸)와 동일시할 때, 그대는 거친 사물들을 봅니다.

그리고 미세신(미묘한 몸), 즉 꿈속에서와 같은 정신적 차원에서는 그대가 사물을 똑같은 미세신으로 보게 됩니다. 깊은 잠 속에서 그러한 동일시가 없을 때에는 그대가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즉, 보이는 사물은 그것을 보는 자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신의 환영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오랜 수행에 의해 신의 모습은 우리가 명상한 모습대로 꿈속에 나타나며, 나중에는 생시의 상태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3.환영은 깨달음과 관계없다

여기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신으로부터 오는 환영이나 상념의 흐름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곳에 지난 한 달 반 동안 머무르고 있지만 그런 어떤 체험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의 은총을 받을 만한 수준이 못되기 때문입니까?

환영이나 상념의 흐름이란 것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개인에 따라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그것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손이 넷인 신이 소라고둥 하나, 바퀴 하나, 곤봉 하나를 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까? 설사 신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제자의 무지는 어떻게 제거합니까?

진리는 영원한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직접 지각은 항상 현존하는 체험입니다. 신을 직접 지각할 때 우리는 신을 알게 됩니다. 이는 그가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헌신자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헌신자의)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다면 환영은 어떤 유용한 목적에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손을 네 개 가진 신이 나타나는 것이 영원한 깨달음이겠습니까? 그것은 현상이며 환입니다. (환영은) 반드시 보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보는 자만이 실재하며 영원한 것입니다.

가령 신이 백만 개의 태양으로 나타난다고 합시다. 그것이 직접 체험이겠습니까? 신의 환영을 보기 위해서는 눈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간접지이지만, 그 보는 자는 직접 체험입니다. 보는 자만이 직접 체험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이꾼타, 까일라사, 인드라국, 짠드라국[힌두교의 천상 세계들]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대는 그것들이 모두 존재한다고 확신해도 됩니다. 거기서도 저와 같은 스와미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고 제자들도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을 것이며, 그들이 무엇을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와 비슷할 것입니다.

뭐가 비슷합니까? 만약 누가 짠드라국을 보면 그는 인드라국에 대해 묻고, 인드라국을 알고 나면 바이꾼타와 까일라사에 대해 묻는 그런 식인데, 마음은 계속 밖으로 헤매는 것입니다. 어디에 평안이 있습니까?

만약 평안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을 확보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은 자기탐구입니다. 자기탐구를 통해서 진아 깨달음이 가능합니다. 만약 우리가 진아를 깨달으면, 이러한 모든 세계가 자신의 진아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진아이며, 만약 우리가 진아를 깨달으면 진아와 다른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는 이와 같은 질문들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바이꾼타나 까일라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대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대는 여기 어떻게 있습니까? 그대는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먼저 알고 난 뒤에 그런 모든 세계들에 대해서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4.최고의 초능력은 진아 깨달음

빠딴잘리의 <요가경>에서 이야기하는 초능력들은 사실입니까, 아니면 단지 그의 꿈입니까?

자신이 브라만, 즉 진아인 사람은 그러한 초능력들을 높게 보지 않겠지요. 빠딴잘리 자신도 그 같은 초능력들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수련해야 하며, 진아 깨달음을 장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초인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능력이 높든 낮든, 보통 마음의 능력이든 초인적 마음의 능력이든, 그것들은 그 능력을 가진 사람과 관련해서만 존재합니다. 그것이 누구인지 찾아내십시오.

초능력은 수행 도상에서 (저절로) 얻어집니까, 아니면 그것은 해탈에 반대되는 것입니까?

최고의 초능력은 진아 깨달음입니다. 그대가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무지의 길로 다시는 들어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초능력들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초능력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깨달음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문을 외거나, 신비한 효능이 있는 약을 복용하거나, 혹독한 고행 또는 어떤 종류의 삼매에 의해서 어떤 능력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들은 진아지에 이르는 (바른) 방편이 아닙니다. 그러한 능력을 얻어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진아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되는 힘과 지의 나툼입니다. 그것은 진아에 도달한 사람의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수행의 산물인 초능력들입니다. 그것은 저절로 나타나며, 신이 주는 것입니다.

그 능력들은 그의 운명에 따라 나타나지만, 그것이 나타나든 않든 지고의 평안 속에 자리잡은 진인은 그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는 진아를 알고 있고 그것이야말로 부동의 초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능력들은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면 그것이 어떤 능력들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5.초능력은 해탈의 장애물

진인은 다른 사람들이 진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그의 신비한 능력들을 사용합니까, 아니면 그의 진아 깨달음이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하는 데 충분합니까?

그의 진아 깨달음의 힘은, 다른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초능력은 종류도 많고 다양하다고 하지만, 그 종류도 많고 다양한 초능력 중에서 진지가 최고의 초능력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초능력을 가진 사람도 진지를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지를 얻은 사람은 다른 초능력을 바라지 않겠지요. 그러니 오로지 진지를 열망하십시오.

비록 이런 능력들이 그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이겠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열망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대단해 보이는 모든 능력들이 하나의 변치 않는 진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자신을 기꺼이 내주며, 자신이 모든 것인 신에게, 가치 없는 초능력 몇 가지를 욕심 내어 구걸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기꺼이 줄 수 있는 관대한 성품의 자선가에게, 가치 없는 상한 죽 한 그릇을 구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고의 헌신이라는 열렬한 불길에 의해 점화되는 심장 안에는, 모든 신비한 능력들이 집결합니다. 그러나 주의 발 아래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던져 버린 헌신자는, 그러한 초능력들에 대하여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해탈에로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구도자들이 신비한 능력에 마음을 두면, 그들의 두터운 속박은 더욱 견고해지고, 따라서 그들의 에고는 광채를 더해갈 것입니다.

완전한 전체요 해탈의 광명인 진아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진지를 성취하는 것이며, 아니마[원자만큼이나 작아질 수 있는 능력]를 위시한 다른 종류의 성취(초능력)는 어리석은 마음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망상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보면서도, 그것이 단지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 전구 만큼이나 작은 것으로 태어나지만, 자라면 덩치 큰 레슬링 선수가 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연설가, 정치가 또는 진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으로 보지 않고, 송장이 말을 하면 놀래자빠집니다.

6.얻은 것은 반드시 잃는다

저는 20년이 넘게 형이상학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들이 체험했다고 하는 어떤 특이한 체험도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투시력이나 투청력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 육신 안에 갇혀 있을 뿐, 그 이상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실재는 오직 하나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그것 안의, 그것의, 그리고 그것에 의한 현상들일 뿐입니다. 보는 자, 보이는 대상 그리고 봄[見]이 모두 진아일 뿐입니다. 누가 진아를 젖혀두고 보거나 들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거나 듣는 것과, 아주 먼 거리에서 보거나 듣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두 경우 다 시각과 청각 기관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나 그 중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투시나 투청에 대해 왜 매력을 느껴야 합니까? 더군다나 얻은 것은 때가 되면 잃습니다. 그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텔레파시 같은 능력을 얻는 것은 좋지 않습니까?

텔레파시나 무선통신은 멀리서 보거나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것들은 듣고 본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가까이서 들으나 멀리서 들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근본적 요소는 듣는 자, 즉 주체입니다. 듣는 자나 보는 자가 없으면,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후자는 마음의 작용들입니다. 따라서 신비한 능력들은 마음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진아에 본래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래적이지 않고 습득된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이 초능력이란 확장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불행을 느낍니다. 이 때문에 그는 행복해질까 해서 그의 능력을 확장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될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제한된 지각 능력 때문에 불행하다면, 지각 능력이 확장됨에 비례하여 불행도 커지겠지요. 신비한 능력들은 누구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능력들을 어디다 씁니까? 초능력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는 남들의 존경을 구하며, 그것을 얻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를 존경할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또 자기보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질투심을 유발하고 불행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능력입니까? (물질적) 번영을 쌓아올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최고의 완성입니다.


출처:지금 이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