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파고드는 이야기들.

미각 언어가 상징하는 것.

별관신사 2019. 11. 11. 06:25

가는 손님은 뒷꼭지가 예쁘다. 는 말도 있다.

얼마나 먹은 일에 여유가 없었으면 이런 말이 다

생겼는가? 그러기에 모든 관심은 어른이고


아이이고 자연히 먹는 일에 쏠리지 않을 수 없

었다. 미각언어가 발달한 것도 다 그런데에 있다.

아무리 언어가 풍부한 나라라 할 지라도 쓰고


씁쓸하고 쓰디쓰고 또 달고 들큼하고 달콤하고

달짝지근하고를 구별할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오직 우리만이 그 달콤한 혓바닥의 미각을 언어로


가려 나타낼 뿐이다. 먹는다는 말부터가 얼마나

다양하게 쓰이는 것일까? 나이도 먹고 더위도

먹고 공금(公金)도 먹으며 심지어는 욕까지도


먹는다고 한다. 사람의 성격을 평가하는 데도

싱거운 놈 짠놈 매운놈 이라고 한다.  외국인이

들으면 식인종이라고 할런지 모른다.


결국 우리의 설움은 정신적인 것 보다는 육체적인

것에서 오는것, 더 까다로운 말로 하자면 형이상학

적인 슬픔이 아니라 형이하학적인 울음이었던


것이다. 기쁜일보다 슬픈일이 더 많은 것을 가리켜

손톱은 슬플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때마다 돋는다

라고 말한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손톱이 발톱보다 더 잘 자라다는 데서 그런 비유가

생긴 것이지만 그것을 더 깊이 분석해 보면 기쁨이나

슬픔은 정신의 성장이 아니라 육신의 성장을 좌우함을


알 수 있다. 영어의 sad(슬프다)는 독일의 satt에서 온

말이다. 그 어원은 포식하다 배부르다 물리다(sayiate)

와 같은 것이다. 같은 슬픔이라 할 지라도


우리와는 얼마나 그 차원이 다른가? 우리는 배고픈

설음이며 그들은 배가 부른 다음에 오는 슬픔 즉

포식뒤에 오는 정신적인 비탄이요 권태다.


호머의 오딧세이에 바로 그런 장면이 있다.

오딧세우스 장군이 괴물 시라에게 여섯명의 부하를

먹히고 간신히 그곳을 피해 시칠리아의 해안가에


배를 정박시켰다.오딧세우스 일행은 거기에서 기갈을

채우기 위하여 밥을 지어 먹는다. 그리고 배가 부르자

그들은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고 슬피우는 것이다.


서구의 슬픔(sadncss)은 어원 그대로 이렇게 포식

뒤에 생겨나는 것이지만 우리의 울음은 포식이전에

허리띠를 죄며 흐느끼는 눈물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눈물은 낭만적인 것도 시적인 것도

아니였다. 산문적인 너무나도 산문적인 눈물, 현실

속에서의 울음일 경우가 많다.


눈물이란 말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는 물 이란 뜻이다. 코에서 흐르는 물을 콧물

이라고 하듯 그것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산문적인


이름이다. 영어의 티어나 프랑스어의 라르므는

다 같은 독일어인데 우리의 눈물만은 이상스럽게도

복합어인 눈+물이다. 그렇게 수없이 흘린 눈물


이였지만 때묻은 옷고름 자락으로 닦던 우리의

그 눈물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움이 될 수도 없는

덤덤한 물 이상의 것이 아니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픈 창자에서 흐르는

눈물엔 미학조차 허용되지 않았단 말인가?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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