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파고드는 이야기들.

윳놀이와 사색당쟁.

별관신사 2019. 11. 13. 02:01

우리는 윳놀이를 좋아한다.  멀리 삼국시대때 부터

있던 고유의 풍습이다.그러나 윳놀이에는 무언가

한국적인 비극이 서려있는 것 같다.


던져진 윳가락은 엎어지도 하고 젖혀지기도 해서

그때 그때 운명도를 만들어 낸다. 한번 떨어진

윳가락들은 다시는 변경될 수도 없고 고쳐질 수도


없다. 도면 도고 개면 개다. 그래서 때로는 윳놀이가

운명을 점치는 윳점으로 변하기도 한 것이다.

서구의 주사위도 그 면에 있어서는 물론 다를 것이


없다. 그것도 역시 우연을 향해 내던져진 운명의

숫자인 것이다.  그래서 주사위(dice)란 말의 어원

에는 운명에 의해서 주어진 것(datum)이라는


뜻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 같은 운명속에

내맡긴 행위라 할 지라도 윳은 주사위에 비해 한층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면체의 주사위는


개개의 면이 각각 독립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지만

윳은 하나하나의 윳가락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그

연관성 아래 비로소 결정적인 한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윳가락 하나마다 엎어지고 젖혀지는 운명이

있고 도 그러한 운명들이 합쳐진 전체의 운명이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주사위는 어디까지나 홀로있는 운명이지만 윳가락은

서로잇는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로 관련된 운명성

 이것이야 말로 한국인의 특히 그 한국적 사회풍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서구를 꿰뚫고 흐르는 인간의

힘은 한 개인의 영웅주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특히 한국은 개인의 운명 보다는


파당이라는 서로 연관된 운명의 형세 밑에서 권력과

행운의 득실극(得失劇)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개의 윳가락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앉았으면


조선의 그 사색당쟁이 눈앞에 어린다. 나의 운수만으로는

안된다.동인이라든지 서인이라든지 남인이라든지

북인이라든지 그 당파의 운이 펴지면 득세를 하고


한번 악운이 몰아치면 다같이 쓰러지는 조락의 길을

밟아야 한다. 백의 종군을 한 이순신에게서 승전한

장군이 돌아갈 고향을 찿지 못했던 그 이순신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것도 개인의 운명이라기 보다는

시들어 가는 남인의 운명이였다. 아니 굴러 떨어지는

그 운명의 윳가락 그것 보다도 말판에서 뛰고있는


말들을 볼 때 우리는 한층 더 절실한 이 민족의 비극을

암시받게 된다. 윳의 말판이야 말로 저 피비린내 나는

사화당쟁의 압축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사위놀음과는 달리 그것은 앞에가는 말을 잡아먹는

놀음이다. 적의 말을 잡아먹는 맛에 윳을 노는지도

모른다. 피나는 노력으로 출구직전까지 간 말의


뒷덜미를 쳐 잡아 먹을 때 한편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오고 한평에서는 애석하고 억울한 탄성이 흘러

나온다.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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