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봄:덧붙여 종속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별관신사 2014. 7. 31. 04:44

덧붙여 종속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크리슈나무르티: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봄: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가야 할 점은 지성은 자신의 진리를 위해서
상황에 의존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지성은
만일 두뇌가 건강하지 않다면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봄: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성은 두뇌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크리슈나무르티:그렇다면 지성은 두뇌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봄:지성이 두뇌의 정적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두뇌의 활동에서 연유되는 것은 아니지요

봄: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두뇌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에도 이 문제를 토론했었습니다 그때 나는 물리학의 측정도구가 두 가지 방법, 즉
적극적인 방법과 소극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검침기

속의 바늘의 흔들림을 보고 전류를 측정할 수 있으며 또 소위 휘트스톤브리지(역주:
전기저항측정기)라는 측정기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바늘이 0을 가리키고 있으면
조화, 즉 전체 회로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극적인 측정기를

사용할 경우, 측정기의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표시인 셈입니다 세계를 형상화시키는 데 있어 두뇌가 사고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런지는 ...

크리슈나무르티:그것이 사고의 기능이지요 여러 기능 중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봄:사고의 다른 기능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비조화를 나타내는 운동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렇습니다 비조화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지성은 두뇌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점에 대해 결론에 도달한
것인가요? 또 우리가 종속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봄: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지요 단순히 기계적 종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의미 즉 하나는 다른하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만일
'나는 존재하기 위해 음식에 의존한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내가 먹는 음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봄:따라서 나는 지성이 그 존재를 위해 이처럼 두뇌에 의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부조화를 표시할 수 있을지라도, 두뇌는 지성의 내용과 전혀 관련을 맺고 있지
않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렇다면 두뇌가 조화를 이루지 않을 경우 지성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봄:그것이 문제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우리가 말하려는 것도 그점에 대한 것이지요 두뇌가 손상되어
있다면 지성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봄:지성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지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지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뇌가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하지만 두뇌는 도구일 뿐입니다

봄:두뇌는 이러한 조화나 부조화를 지적해 내지요

크리슈나무르티:하지만 두뇌는 창조자의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봄:두뇌는 지성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지만 지성으로 하여금 그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도구의 역할은 틀림없이 해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두뇌가 시간의 범주 안에서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한다면, 지성은 시간의
운동 속에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지성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뇌의 정적이
필요할까요?

봄:그렇습니다 표현을 약간 달리하면 두뇌라는 도구의 정적은 지성의 활동인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봄:동일한 하나의 것이지요 도구의 비정적은 지성의 실패이니까요

크리슈나무르티:옳은 이야기입니다

봄:그러나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지성은 어떤 의미에서 물질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몇몇 사람은 정신과 물질은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입니다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정신이 고요한 정적 속에 유지시키지 위해서는 이러한 질문이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하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정신을 혼란시키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러나 알다시피 당신이 '정신을 고요한 정적 속에 유지시키는
것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고가 지성의 인식을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겠지요 그렇지요? 사고와 물질, 지성의

운동과 지성의 움직임 또는 사고가 그 자신에게 '나는 지성의 자각을 돕기 위해
조용히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겠지요 사고는 측정가능하며 동시에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조화나 부조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사고의

움직임은 모든 것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고가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고도
'나는 이것 또는 저것을 가지기 위해 조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사고는 시간의 범주 안에 있게 됩니다

봄:그렇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사고는 시간을 사로잡기 위해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성은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경우에 발생하지 않으며--언제 자각하게 될까요?

봄 질문은 다시 한번 시간 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봄:당신의 말은, 지성이 인식하는 상황은 사고의 비활동중에 일어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크리슈나무르티:그렇습니다

봄:그렇지만 그것은 인식과 같은 것이지 단순한 상황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당신은
지성이 깨어나는 상황이 존재하는지를 질문할 수조차 없습니다 더욱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사고의 일정한 형태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그렇습니다 어떠한 방향,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활동중이거나 비활동중에 있는 사고의 운동은 전부 여전히 시간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고의 운동이든지간에 이것이 우리의 의견의 일치점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