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를 타고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뱀의 모습
을 새겨넣은 칼과 물푸레나무 줄기로 만든 창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에는 독수리가 새겨진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그녀는 빙하와 피오르드를 넘어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스카디. 얼마 전에 이둔을 유괴했다가 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인 티아지의 딸이
다. 그녀는 춥디추운 산꼭대기의 트림헤임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까지 안 돌아오시는 걸 보면 아버지는 놈들에게 비참하게 당하신 게 틀림없어.
스키의 여왕은 그렇게 되뇌며 거인 나라와 신들의 나라를 가로질러 흐르는 이빙 강을 뛰어넘었
다. 태양이 막 지평선을 미끄러져 내려가자 서쪽 하늘이 불타올랐다.
이둔을 되찾고 청춘을 되찾은 신들은 긴장이 풀려 날마다 축제 분위기에서 살고 있었다. 따사로
운 태양, 지저귀는 새, 파릇파릇한 풀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한창 평화를 즐기고 있는 신들에게 헤임달이 경계 경보를 발령했다.
비프로스트에 신원미상의 거인 출현! 완전무장을 하고 스키를 타고 있음!
스카디가 다가온다고 헤임달이 경계경보를 내렸다. 그러나 신들은 다시는 피를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몇몇 신이 직접 나서서 스카디를 만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유감이오. 그 대가로 황금을 드리겠소.
스카디는 코웃음을 쳤다.
황금? 웃기는 소리 말아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당신들이 오히려 더 잘 알 텐
데요.
신들은 물었다.
그럼 무엇으로 보상하면 되겠소?
스카디는 신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한 젊은 신에게서 멈추었다. 그녀는 비록 추운
나라에서 온 사나운 여전사이지만 사랑을 갈구하고 함께 살 남성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시선을 고정시킨 상대상은 발데르, 오딘의 아들이었다. 스카디는 주저없이 말했다.
남편을 주세요.
신들은 당황했지만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다하여 대책을 상의했다. 결국 자
기들 중의 한 명을 스카디가 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딘은 발데르를 보는 스카디의 시선이 예
사롭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카디에게 마음대로 고를 자유를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스카디를 불러 조선을 달았다.
아스가르드이 총각 신들 가운데 아무나 한 명을 고르도록 해라. 단, 얼굴을 보고 고를 수는 없
다. 모두 네 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내밀 테니 발을 보고 선택해라. 그런 다음 얼굴을 보게
해주마.
스카디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신들은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맨발로 뜰에 정렬했고, 스카디는 주저없이 그 중에 가장 잘생긴 발을 골랐다. 가장 멋진
발데르가 발도 가장 잘 생겼을 거라고 판다했던 것이다.
역시 눈썰미가 좋아.
오딘은 스카디의 어깨를 톡톡 치며 칭찬의 말인지 놀리는 말인지를 모를 묘한 말투로 말을 건
넸다. 스카디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발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두건을 벗어던진 상대는 뜻밖에도 발데르가 아니라 항해와 고기잡이의 신 뇨르드였다. 그의 얼굴은 오랜 바다 생활로 인해 절어 있었고 심지어는 소금냄새마저 역하게 풍겨 나왔다. 스카디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
러섰다.
그 바람에 웃고 서 있던 뇨르드가 무안해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뇨르드라면 신들의 전쟁이 끝난 뒤 교환 사절로 아
스가르드에와서 살게 된 바나 신족의 신이다. 그의 슬하에는 이미 프레이르와 프레야라는 장성한 아들 딸이 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총각 신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스카디의 점지를 받게 되었는가? 그 해답은 아사 신족과 바나 신족 사이의 풍습 차이에 있다. 뇨르다가 고향에 두고 온
처는 그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런 근친상간을 아사 신족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딘을 비록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뇨르드에게 독신 생활을 강요해왔던 것이다.
소, 속았어!
스카디가 비명을 질렀다.
이봐요, 로키가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요.
오딘이 스카디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건네자 신들 사이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얼음장같이 차가운 스카디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오딘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로키는 어디 있는가? 로키 좀 데려와!
로키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걸어와 스카디의 표정을 흘끔흘끔 살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생각할까 봐서였다.
이봐, 자네가 책임지고 이 아가씨를 좀 웃겨보게.
로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스카디 앞에서 긴 가죽끈을 꺼냈다. 그리 옆에 서 있는 염
소를 가리키더니 스카디에게 추파를 보내며 말했다.
이 염소는 제가 시장에 가서 산 놈입죠. 잘 아시다시피 염소란 놈은 제법 꾀가 바르죠.
그는 가죽끈의 한쪽 끝을 염소의 수염에 묶었다.
이렇게 끈 한쪽으로 염소를 묶고 보니 문제가 생겼어요. 제 두손은 모두 물건을 들고 있었거든
요. 그래서 제가 끈의 다른 쪽은 어디에 묶어야 했는지 아세요?
스카디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어디다 묶었다는 거예요?
로키가 엉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다 묶기는요. 이렇게 제 다리 사이에다 묶을 수밖에요!
스카디는 낯을 붉혔다. 로키는 가죽끈 한쪽을 고리처럼 만들어 자기 음낭에다 묶었던 것이다.
염소가 풀을 뜯으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가죽끈은 팽팽해졌다.
마침 그때는 아침이었죠. 아주 이른 아침이었어요. 아직 쏙독새가 지저귀고 있더군요.
로키는 손을 둥글게 해서 입에 갖다 대고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었다.
쏙독, 쏙독, 쏙독...이얍!
로키가 아랫도리에 힘을 주어 가죽끈을 잡아당기자 염소는 끌려 오지 않으려고 버텼다.
음매!
영차!
염소와 로키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신들은 이 기상천외한 쇼를 보면서 박장대소를 했으
며 여신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훔쳐
보았다. 스카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마침내 염소가 포기하고 로키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기 때문에 로키는 반동을 못이겨 뒤로 자빠지면서 스카디의 품에 안겼다. 스카디는 끝내 참고 있던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오딘이 주머니에서 두 개의 투명한 구슬을 꺼냈다. 스카디는 그것이 아버지의 두 눈알이라는 것
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걸 보거라!
오딘은 티아지의 두 눈을 하늘로 던져 올리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두 개의 별이 되어 너와 우리 모두를 내려다볼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뇨르드는 신접 살림을 자기 조선소가 있는 노아툰에 차리고 싶어 했다. 그런 스카디는 자기 집
인 트림헤임에서가 아니면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우겼다. 한 차례의 밀고 당기기 끝에 두 남
녀는 절충을 보았다. 아흐레 밤은 뇨르드의 조선소에서, 또 아흐레 밤은 트림헤임에서 번갈아가며 살기로 한 것이다.
합의를 한 신혼부부는 아스가르드를 떠나 요툰헤임으로 갔다. 바위와 산비탈을 넘고 눈부신 눈
위를 지나고 황량한 벌판을 지났다. 죽음과도 같은 동토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스카디의 기쁨은 컸다. 그러나 뇨르드는 이 얼음산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끼룩기룩하는 갈매기 소리가 그립군. 저 늑대 울음소리는 정말 소름끼쳐."
아흐레가 지나자 신혼부부는 노아툰으로 가서 아흐레를 지냈다. 스카디는 갈매기가 시끄럽게 날아다니고 파도가 쳐대는 바다가 싫어다.
아아, 소리없이 끓어오르며 흐르는 빙하가 그리워요. 여기서는 너무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요. 선착장도 시끄럽긴 마찬가지고. 아아, 저 갈매기 소리!
부부는 결혼한 지 열여드레 만에, 그러니까 서로의 집에서 한번씩 살아본 직후에 별거를 결정했
다. 자라난 환경에서 오는 습성의 차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사랑이 많지 않았던 신과 거인 부부는 파탄이 나버렸다. 뇨르드는 그대로 노아툼에 머물고 스카디는 요툰헤이으로 떠났다.
그녀는 신이 나서 스키를 타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내달렸다. 스키의 여왕은 이제 설원으로 돌
아왔다. 그녀는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눈 내린 계곡과 들판을 누비면서 들짐승들을 사냥했다. 동토의 여신 스카디는 가는 곳마다 상처와 죽음을 거두었다.
뇨르드와 스카디의 결혼은 여름바다와 겨울산의 결혼, 생명과 죽음 사이의 화해였다. 그러나 결
국 이 양극은 서로를 거부하였다. 온 세상에서 삶과 죽음의 대립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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