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르의 시종 스키르니르(빛나는 자)는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프레이르님, 아버님(뇨르드)께서 몹시 걱정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그토
록 여위어 가시는지요?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프레이르는 넋나간 얼굴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야아, 그녀 대문이야.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절규하는 프레이르를 보면서 스키르니르는 가슴이 아팠다. 프레이르의 아버지인 뇨르드가
거인족의 여인 스카디와의 결혼생활에서 쓴맛을 본 지 얼마나 됏다고 이번엔 그 아들이 한
여인 때문에 저 꼴이 되었는고?
어떤 여인을 말씀하십니까? 제게 알려주십시오. 주인님만 괜찮다면 제가 가서 그 여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스키르니르가 간곡히 청하자 프레이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이 세상에서 그녀를 나만큼 사랑해 줄 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지 않을걸.
프레이르는 넋두리를 한 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는 오딘 못지않은 권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오딘의 허락을 받아 오딘 차지인
용상 힐드스칼프에 앉아 북쪽 요툰헤임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때마침 거인 기미르의 멋
진 저택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게르드. 마치 은빛으로 빚은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저택의 문을 닫으려고 하자 갑자기 온 세상이 밝아졌다.
그 순간 프레이르는 쇠도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강한 충격을 받고 그녀를 사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거인족의 여인을 사모한다면 자네도 실망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네. 기왕 이렇게
털어놨으니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해야겠네. 부디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서 내 생각을 전하고
의향을 물어주게. 그리고 제발 그녀를 내 앞에 데리고 와주게.
스키르니르는 한숨을 내쉬고 난 뒤 주인에게 말했다.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릴 수 있는 말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유사시에는 저 혼자 날아
다니면서 거인들과 싸울 수 있는 칼도 주십시오.
프레이르는 스키르니르가 요구한 명마와 보검을 주었다. 그러나 스키르니르가 힘차게 요
툰헤임을 향해 떠난 직후 엄청난 후회가 밀어닥쳤다. 말은 몰라도 그 칼만은 프레이르가 보
관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일찍이 우르드 샘물일 지키는 운명의 여신들이 말하기를 프레이르
의 칼은 신과 거인의 최후의 대결 때 신들을 파멸로부터 지켜줄 보검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불의 나라 무스펠에서 일어나 온 세상을 불질러 버리기 위해 쳐들어올 불의 거인 수르트는
오직 그 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늦은 프레이르의 후회를 알지 못하는 스키르니르는 힘차게 말을 몰아 이빙 강(아스가르
드와 요툰헤임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밤새 산길을 달려 올라가니 이글
거리는 불의 장막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던 속력 그대
로 불을 뚫고 힘차게 전진했다.
날이 밝을 무렵 그들은 잡초가 무성한 분지에 다다랐다. 이곳은 젖가슴처럼 불룩 튀어나
온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이 분지의 한가운데에 기미르의 저택이 있었고 그곳과
담 하나 사이로 게르드의 집도 있었다. 게르드의 집에는 사납게 생긴 두 마리의 개가 지키
고 있었다.
스키르니르가 주변을 돌아보자 언덕 위에 목동이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스키르니르는 언
덕을 올라가 그에게 물었다.
안녕하시오? 지나가는 나그넨데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당신 이렇게 높은 데서 일하다
보면 저 아래 분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휜히 다 알고 있겠죠? 자, 어떻게 하면 저 개들의 아
가리를 틀어 막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두 눈이 휘둥그레진 목동이 되물었다.
아니, 당신 죽으려고 작정했소? 아니면 벌써 죽은 귀신이오? 세상에, 감히 기미르의 딸을
만나보겠다니! 뼈도 못 추리기 전에 어서 가던 길이나 가시구려.
스키르니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릭 게르드가 들으라고 목
청을 돋워 외쳤다.
게르드, 나와!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놈이라고. 집 밖으로 나와 험한 세상을 떠돌
아 다니는 이상 계집애처럼 몸을 사리는 것보다는 배짱 좋게 행동하는 게 훨씬 낫다고! 내
가 죽고 사는 문제는 운명의 여신들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이니까 말야.
목청 큰 스키르니르가 떠들자 땅이 흔들리고 집이 기우뚱했다. 게르드는 그가 보통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하인을 시켜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사납게 생긴 개들도 여주인
의 명령이 떨어진 터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스키르니르를 노려보았다. 스키르니르는 그런
개들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고는 늘름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소복을 입은 게르드가 나타났다.
당신은 알프헤임에서 온 난쟁이인가요, 신인가요?
게르드의 목소리에는 소름기치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스키르니르는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으면서 말했다.
저는 불길을 뚫고 오긴했지만 난쟁이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저는 위대하신 프레이르
님의 부탁을 받고 당신에게 그분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스키르니르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청춘의 사과 열한 개가 있소. 당신ㅇ 프레이르 님께 가서 그분을 남편으로 부르
게 되면 이 사과들은 모두 당신 거요.
게르드는 냉랭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대꾸했다.
어림없는 짓! 황금 사과로 청춘을 약속한다고 해서 사랑을 살 수 있다고 믿다니! 프레이
르는 신, 나는 거인. 게다가 그분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신이고, 나는 만물을 얼려 버리는 여
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한 지붕 아래서는 살 수 없는 몸이라구요!
스키르니르는 잇따라 선물을 제시했다.
금팔찌도 있소이다. 오딘 님이 오래전에 난쟁이 에이트리 형제로부터 선물받은 휘황찬란
한 팔찌죠. 아흐레째마다 여덟 개의 새 팔찌가 생겨나는 보물이랍니다.
그러나 게르드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잘 모르시는구요.
스키르니르는 작전을 바꿨다. 그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
여 있었다.
그렇다면 내 손에 들고 있는 칼은 어떻소? 말을 안 들으면 이걸로 당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도 있소.
게르드는 비웃음을 흘렸다.
머리통 날리는 거 좋아하셔! 당신이 여기 있다고 아버지께 알리면 꽤나 좋아하실 걸요.
오랜만에 힘 좀 쓰게 됐으니까 말예요.
스키르니르는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게르드를 노려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참 한심한 아가씨로구먼. 오늘이 당신 아버님 제삿날이 될
수도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구.
스키르니르는 칼을 내려놓고 마술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수리수리 마수리! 넌 이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독수리 언덕에 올라가 지옥 문턱을 보
고 있어야 할걸. 자꾸 구역질만 나서 아무것도 못 먹을 게다. 게다가 몰골도 흉하게 변해버
리겠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 넌 원통하고 분해서 가슴이 갈가리 찢어질 거야. 저주스런 요
물들이 다가와 너를 사정없이 찔러댈 테지. 머리가 셋 달린 괴물거인과 살게 되겠지만 죽을
때까지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못해. 채울 수 없는 정욕이 네 온몸을 괴롭히겠지.
스키르니르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고 더욱 무서운 얼굴로 주문을 외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여인이여, 그대는 모든 신들의 분노를 사고 말았어. 거인들아,
들어라.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들으소서! 이제 이 여인은 세상의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노
라. 세상의 어떤 남자와도 즐길 수 없으리라. 우주 나무 이그드라실 뿌리 아래에서 오줌 가
득한 뿔이 너를 짓누르리라. 아무리 목말라도 네가 마실 수 있는 건 그 오줌뿐이리니. 내 이
렇게 저주를 내리나니 합당한 이유가 있기 전에는 이 저주가 풀리지 않으리라.
겁에 질린 게르드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스키르니르에게 굴복했다. 그에게
술을 대젒하면서 프레이르를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좀더 확실한 약속이 필요하오. 정확히 언제 어디서 그분을 만나시겠소?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리 숲을 아시죠? 아흐레 후에 그곳에서 그분게 저를 바치겠어요.
스키르니르는 아침이 오기 전에 게르드의 집을 떠났다. 밤을 꼬박 새운 프레이르는 안달
이 나서 집 밖에 나와 스키르니르를 기다렸다. 그는 스키르니르가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다
그쳐 물었다.
안장에서 내리기 전에 말해 줘! 네가 요툰헤임에서 가지고 온 것은 기쁨이냐, 슬픔이냐?
스키르니르는 환하게 웃으며 게르드와 한 약속을 말해 주었다. 프레이르는 환희에 젖어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흐레 밤! 하룻밤도 내겐 한달 같건만. 오, 언제 그날이 오려나?
이제 우리는 두 남녀의 아름다운 밀회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로 하자. 겨울철 언 땅에서
보리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 그 땅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친다면 바로 그곳에서 프레이
르와 게르드가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기를.
'神話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르, 여장을 하고 거인국으로 가다 (0) | 2015.10.19 |
---|---|
북유럽 신화여행. 난쟁이 알비스, 토르의 딸을 사모하다 돌이되다. (0) | 2015.10.17 |
북유럽 신화여행. 여름바다의 신과 겨울산의 여신이 혼인하다 (0) | 2015.10.13 |
북유럽 신화여행. 청춘의 사과가 없어지자 신들이 늙어가다 (0) | 2015.10.12 |
북유럽 신화여행. 무너진 성벽을 세월줄 테니 프레야를 주시오! (0) | 2015.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