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사랑은 참된 생활의 유일(唯一)하고 완전한 활동이다.

별관신사 2014. 3. 11. 06:42

벗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사랑, 이것 이외에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것이 자기 희생일 때 비로소 사랑이다. 인간이 남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이나 힘을 바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그

육체를 희생시키고, 그에게 그 생명을 바칠 때 우리들은 오직 이것만을
사랑으로 인정하고, 오직 이러한 사랑에 있어서만이 행복을 찾아보고
사랑의 보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 이 한가지 일로서만이 세계는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어린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아기의 먹이로서 직접 자기의 그 육체를 바치고
있다. 그것 없이는 아기는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곧 사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즉 자기의 육체를 남을 양식으로
바치고 있는 것은 남의 행복을 위해 노동에 의해서 그 육체를 소모시키며,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모든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사랑은 그저 자기 희생의 가능성과 그를 사랑하고 있는 존재와의 사이에
그 희생을 방해하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내 자식을
유모에게 맡겨 두는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수 없다. 돈을 벌어서

그것을 저축해 두는 자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빛 속에 있다 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속에 있는 자이며, 그의

내부에는 유혹이 없다. 그러나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갈 바를 모른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이다.
....」 우리들은 사랑을 말과 혀로 하지 말고 행동과 실천으로써 할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자기가 진리에서 나왔음을 알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 이같이 하여 사랑은 우리들 속에서
완전할 수 있고, 우리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주(主)처럼 행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공포가 없다. 완전한 사랑은 공포를 쫓아 버린다. 생각컨대 공포 속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이 충분하지

못한 자인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이다. 「너희
마음의 모든 것으로써, 너희 영혼의 모든 것으로써 너희 이해의 모든

것으로써 주이신 너희 신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이며, 가장 큰
가르침이다.」
둘째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너희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의 가까운 자를 사랑하라.」 이렇게 교법자는 말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은 옳다. 그처럼 실행하라.」 즉
「신을 사랑하고 가까운 자를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는 살게 되리라.」

참된 사랑은 생명이 그 자체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이미 죽음에서 삶으로 옳아 갔음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들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는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속에 있는 자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랑은 생명 그 자체다. 그러나 불합리한

고통이 따름으로써 멸망되는 생명이 아니고 축복 받은 끝없는 생명이다.
우리들은 모두 이 일을 알고 있다. 사랑은 이성의 결론이 아니다. 또
일정한 활동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생명의 환희에 찬 활동 그 자체이다. 우리들 일동은 이 활동을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그릇된 세속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영혼 속에서
그것을 어둡게 하고, 그것을 경험할 가능을 우리들로부터 빼앗기까지에

이르는 사이에 알뜰히 자기 자신 속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 이것은 선택된 사람들 내지 사물에 대한 사랑처럼 개인의 일시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대한 편애가 아니고 동물아의 행복 부정 뒤에 사람

속에 남은 자기 이외의 것이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든지 비록 단 한번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이 축복된 감정을 알지 못할 자가 있으랴! 이것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은 오직 영혼이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생명을 짓밟아버려 여러
가지 허위(虛僞)에 가리워지지 않은 유년시절에 한하는 일이고, 이 축복된
감동의 정서(情緖)에 유혹(誘惑)되면 사람은 모든 것, 가까운 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악한 자들도, 적도, 개도, 말도, 풀도
사랑하고 싶고, 그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만인을 위해서 좋고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되리라고만 바라는 소원을 낳고 더욱 만인을

위해서 좋도록 스스로 애쓰는 일을 바라게 되고, 온갖 살아 있는 것이
모두 환희에 가득차 있도록 자기 자신의 생명마저도 바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아니 오직 이 하나만이 그 속에

인간의 목숨을 지니는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 즉 그 속에서만 생명이 깃든 이 사랑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우리들이 사랑하고 부르는 인간의 여러 가지 육욕의 움틈, 참된 사랑과

비슷한 잡초의 어지러운 움 속에 섞여서 겨우 눈에 띠일 정도의 부드러운
움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또 그 사람 자신에게도,
장차는 새들의 보금 자리라도 될 이 훌륭한 나무가 틀임 없이 성장할

움돋이와 모든 다른 움돋이와는 전혀 다른 것 같이 생각된다. 그뿐이랴!
사람들은 처음에는 성장이 빠른 잡초의 움돋이를 오히려 사랑해 주는
경향이 있고, 유일한 것이 움돋이는 시들고 말라죽는다. 그러나 그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 이상으로 흔이 있는 더욱 몹쓸 일은 사람들이
이러한 움돋이 속에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단 한대뿐인 참된 생명이 있는
움돋이가 있음을 듣고 중요한 그것을 짓밟으면서, 그 대신 잡초의 다른

움돋이를 사랑이라 부르고 키우기 시작하는 일이다. 아니 더욱 나쁜 일은
사람들이 거칠은 손으로 그 움돋이를 잡고 이렇게 외친다. 「그래,
이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찾았다. 우리들은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어때 이것을 한번 키워 보자. 사랑이다.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감정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어 심기도 하고,
휘어 고쳐보기도 하고, 그것을 잡아채고, 문질러 버리는 동안에 그 움이

꽃도 피지 못하게 하고 아주 말라버리게 한다. 그러면 그들이나 다른
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다. 무의미한 짓이다.
센티멘탈리즘이다. 그러나 사랑의 움이 움돋이 할 때는 약간의 손질에도

견디지 못하리만큼 부드럽지만 성장해서는 비로소 굳센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하는 것은 모조리 나쁜 결과를 줄 따름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즉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유일한 것인

이성의 태양을 그로부터 가리우지 않게 하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