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 위대한 회교시인 아와디 커만은
문 앞에 앉아 항아리위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위대한 수피 신비주의자인
샴스 에 타브리지가 그 앞을 지나 갔다.
삼스 에 티브리지가 그 신의 행동을 보고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이 대답했다. 물항아리 속의 달을 바라
보고 있습니다. 삼스 에 티브리지는 커다랗게
웃기시작했다. 시인은 기분이 꺼림직해졌다.
군중이 몰려 들었다. 시인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웃는것
입니까? 왜 당신은 나를 조롱합니까?
삼스 에 티브리지가 말했다. 네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왜 곧장 하늘의 달을 쳐다보지 않는가?
달은 저기 있다. 만월이 저기 있다.
그런데 시인은 물 항아리 속에 비춰진 달을
바라보고 있다. 진실을 경전이나 철학속에서
찿는다는 것은 물에 비친 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이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릇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사람은 오직 그의 삶에 대해
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단코
두개의 삶이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당신에게 무슨말을 하든지 그것은
그이 삶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그가 삶을
살았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했을런지
모른다. 그도 누군가를 추종할 것이다.
그 자신도 또 한 모방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전달된 것은 비추어진
그림자의 그림자인 것이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비추어진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를 또다시 비추어 볼 것
이다. 그런데 진짜 달은 저 하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저 달은 당신의 달이다.
곧장 보라. 지금 즉시 보라. 왜 다른사람의
눈을 빌리려 하는가? 당신에게도 눈이
아름다운 눈이 있다. 보라 직접보라.
왜 다른 사람에게 깨달음을 빌리려 하는가?
명심하라 그것이 나에게는 깨달음일 지라도
당신이 그것을 빌리는 순간 당신에게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오직 자기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이
깨달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것은
한낱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더이상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말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란 항상 거짓이다.
오쇼의 죽음의 예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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