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문젭니다. 이건 정말 까다롭습니다. 보세요, 사회는 시민들을 통제하거나 훈련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특정의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경제적 틀에 짜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훈련이라는 건 필요한 것이긴 한가요? 잘 들으세요. "그렇다", "아니다."라는
대답은 아직 하지 마세요. 우리들 대다수, 특히 젊은 사람들은 훈련 같은 것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걸
자유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단지, 훈련이 있어야 한다,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자유로와야
한다는 식의 대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훈련의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에 아주 열심인 운동 선수는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시킵니다. 그렇지요? 이 사람은
운동 자체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일찍 자고, 담배를 삼가고,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 수칙을 잘 따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훈련은 강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갈등을 느끼지 않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히 생긴 습관 같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훈련은 인간의 에너지를 증가시킵니까, 감소시킵니까? 어떤 종교, 어떤 철학을
신봉하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는 스스로의 마음을 훈련시킵니다. 마음을 통제하고, 마음에
저항하고, 마음을 조절하고, 억제하는 등의 훈련 말이지요. 자, 이게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인간의 에너지를 증대시킬 수 있다면, 훈련이라는 건 가치있는 것이겠지요. 의미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인간의 에너지를 억누른다면 아주 해롭고 파괴적인 것일 테지요. 우리에게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훈련을 통해 이 에너지가 생명력을 얻고, 넉넉해질 수
있느냐, 아니면 훈련이 우리의 에너지를 파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거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에너지라는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얼마 안 되는
에너지도, 특정 사회의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도 통제와 위협과 금기에 걸려 억압당하거나
파괴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모방이나 하는, 생명력이 없는 시민들로
전락합니다. 자, 훈련이 원래 개인이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증대시킵니까? 훈련이 그 개인의
삶을 풍요하고 활기차게 만듭니까?
여러분은 모두 젊습니다만, 젊을 때는 모두 에너지로 가득 차 있지요? 여러분은 놀고
싶어합니다. 뛰어다니고 싶어합니다. 떠들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은 그런 상태로
자라고 있는데 선생님은 갖가지 틀에다 짜맞추고, 거푸집에다 부어 그 에너지를 약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여러분이 어른이 되면 그나마 얼마 안 남아 있던 에너지도 사회에 의해
억압당하고 맙니다. 사회는 여러분더러 고만고만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과 사회의 강제에
의해, 여러분이 젊을 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이렇게 파괴당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훈련을 통해 보다 강한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에너지가 얼마 안 된다면, 이를 증대시킬 수는 있는 걸까요? 있다면
훈련이라는 건 의미가 있을 테지요. 그러나 훈련이 정말 여러분 에너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훈련이라는 걸 버려야 할 테지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에너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에너지는 생각하는 힘,
느끼는 힘입니다. 관심, 격정, 정욕, 야심, 증오, 이 모두가 에너지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기계를 발명하고, 다리를 건설하고, 길을 닦고, 논밭을 갈고, 운동 경기를 하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사원에 가고, 신을 예배하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에너지의
표현입니다. 에너지는 환상과 악덕과 고통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최상의 덕성과 파괴적인
행동 역시 인간이 지닌 에너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이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만
분출시키고 다른 방향으로는 분출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사회가 제 편의를
위해서 하는 짓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특정 문화의 패턴에 따라 길들여지고,
마음이 길들여질수록 에너지는 자꾸만 그 힘을 잃어 갑니다.
이제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증대시키고, 이
에너지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만일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너지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입니까? 전쟁을 일으키는 게 에너지의
목적일까요? 제트기를 발명하고, 다른 기계를 발명하기 위해 에너지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루를 찾기 위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아기를 낳기 위해서일까요? 이 일 저 일
시도 때도 없이 걱정하라고 에너지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에너지를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을 때, 우리의 행위가 어떤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행위
이상의 의미말입니다. 이제 분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 궁극적 실재나 신을 찾지 않는다면, 그 에너지의 표현은 파괴와 고통을
야기시키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궁극적인 실재를 찾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런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에너지는 악덕을 편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회는 이런
사람을 통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신 혹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요? 이로써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시민, 사회가 파괴할 수 없는 시민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내 말 잘 듣고 있습니까? 내가 좀
어렵게 말하고 있습니까?
잘 들으세요. 인간은 에너지입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때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고 틀잡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제재가
에너지를 억압합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대다수 어른들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간단한 일을 더러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정말 하고
싶어하는 순간에, 그 일을 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끼는 일이 그것입니다. 놀이를
하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어떻습디까? 놀이에 필요한 에너지가 몸 속에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요? 이 에너지 스스로가 에너지를 통제하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훈련이나 제재 같은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존재를 추구하면 에너지는 스스로를
훈련시킵니다. 궁극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시민이 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시민은 특정 사회나 정부의 거푸집 안에서 틀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은 이 엄청난 에너지를 동원하여 궁극적인 존재, 신, 진리를
찾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진리를 찾는 행위 자체가 곧 훈련입니다. 이로써 자신을
훈련시킨 사람은 참 인간, 완벽한 개인이 됩니다. 특정 사회와 문화의 제약을 받는 흰두,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이런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학교가, 지금처럼 자꾸만
에너지를 억압하지 말고, 학생들의 에너지를 일깨워 진리를 추구하게 하면 여러분이 하는
훈련, 받는 훈련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집에서, 교실에서, 기숙사에서,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듣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부모나 선생님이 이 사회처럼,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목적, 그것은 궁극적인 존재와 신을
찾는 일입니다. 교육자들 중 일부라도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여기에 관심을 쏟는다면 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교육,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여겨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들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포함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에너지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그들은, 몸이 늙은 것도 아닌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요? 사회의 횡포에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세요. 원자력
잠수함과 제트기를 만들 수도 있고, 아름다운 시와 산문을 쓸 수도 있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이 마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에너지는 파괴적인 기능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럴 때
사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의 에너지를 틀잡고, 통제해야겠구나."라고.
내가 보기에는,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에너지를 풀어놓아 선, 진리, 혹은 신을 추구하게
하는 일일 듯합니다. 이렇게 하면 선, 진리, 신이 개인을 참 인간, 따라서 바람직한 시민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훈련이나 규율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가장 파괴적인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제대로 교육을 받고, 생기와 지성, 참된 것을
추구하는 에너지를 가슴 가득 채운 상태로 학교를 떠나 세상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곧 사회에 흡수당하고 맙니다. 사회에 짓눌리고 일그러져 평생을 비참하게,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다. 강이 스스로 그 강물을 감싸는 둑을 만들 듯이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어떤 강제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훈련시킵니다. 강이 바다를 찾아내듯 에너지도
이렇게 자유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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