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모순의 뿌리로서의 욕망을 안다-어떤 건 원하고 어떤 건 원치 않는, 즉
이중의 행동이 그것이다. 우리가 뭔가 즐거운 일을 할 때 거기엔 아무 노력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쾌락은 고통을 가져오고 그래서 고통을 피하려는 발버둥이
있으며, 그리고 그게 또한 에너지의 낭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물론
자연에는 이중성(이원성)이 있다-남자와 여자, 빛과 그림자, 밤과 낮-그러나 내적, 사회적으로,
왜 우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내가 그 까닭을 당신에게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나와
함께 그걸 생각해내도록 해보자. 당신은 찾아내기 위해 당신 자신의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말은 당신이 비치어 보이는 거울에 불과하다. 왜 우리는 이 심리적 이중성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항상 비교하며 키워졌기
때문인가?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에
제약되어 왔다. 우리가 폭력의 반대, 선망의 반대, 질투, 비열함의 반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이중성은 존재하게 된 것인가? 우리는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 반대되는 것을 지렛대로 사용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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