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사회의 요구에 의해 외적으로 훈련되어 있고, 가족에 의해, 우리
자신의 고통에 의해,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어떤 이데올로기가 사실적 패턴에 순응하는
것에 의해 외적으로 훈련되어 있으며-그리고 그런 형태의 훈련이 가장 무딘 것이다.
훈련(수련)은 통제 없이, 억압 없이, 어떤 형태의 공포도 없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이런 단련이 있게 되는가? 훈련이 먼저 있고 나서 자유가 있는게 아니다. 자유는 끝이 아니라
맨처음에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이해하는 것이-이것이 훈련에 순응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인데-훈련 자체이다. 배우는 행위 바로 그것이 단련이며(단련 discipline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가 배운다는 것이다) 배우는 행위 자체가 명징성이 된다. 통제, 억압 및 방종의 본질과
구조 전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의력이 요청된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단련을 부과해서는
안되며, 배우는 행위 바로 그것이 그것 자체의 단련-그 속에는 억압이 없는-을 가져온다.
권위(우리는 지금 법적 권위가 아니라 심리적 권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를 부정하기
위해서는-모든 종교 조직, 전통 및 체험의 권위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왜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복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다시 말해서 그걸 실제로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난, 정당화, 의견 및 수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권위를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그걸 연구한다-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위의
전심리적 구조를 우리들 자신 속에서 연구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검토)하고 있을 때 우리는 전구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가 부정할 때, 바로 그
부정이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빛이다. 지금까지 갑지다고 여겨온 모든 것, 즉 외적 훈련,
영도력, 관념론 같은 것들에 대한 거부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연구행위
그것은 훈련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거부이며, 그리고 바로 그 거부가 긍정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요에로 인도하는 것이 통제가 아님을 안다. 또한 마음이 어떤 대상,
즉 그것에 빠지는 나머지 그것 속에서 스스로를(마음을) 잃어버리는 그런 대상을 가질 때도
그 마음은 고요하지 않다. 그것은 아이에게 재미 있는 장난감을 주는 것과 같다. 즉 그는 아주
조용해지지만, 그러나 그 장난감을 치워버리고는 다시 시끄러운 장난질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열중케 하는 장난감들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매우 조용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형태의 활동-과학적, 문학적 활동이나 또는 어떤 종류의
활동이든지간에-에 헌신할 때, 그 장난감은 다만 그를 흡수할 뿐이며 그가 정말 조용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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