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늙어 가면서 삶의 재미를 잃어 가는 것 같지 않던가요? 혹시, 왜 그럴까 하고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보기에, 젊은이들인 여러분은 행복에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도 문제는 다소간 있겠지요. 시험 걱정도 조금은 여러분을
부담스럽게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삶은 즐거운
것입니다. 내 말 틀렸습니까? 여러분은 삶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에는 사물을
가볍게, 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사물, 다른 의미
있는 사물과의 기분 좋은 교감을 자꾸만 잃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들 상당수가, 이른바 어른이 되면서 기쁨에, 아름다움에, 활짝 열린 하늘에, 이
아름다운 땅에 둔감해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 갖가지 설명이 우리 마음 안을
맴돕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너무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 이게 이런 설명 중의
하납니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어떤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우리에게는 자식도 있고, 책임도 있습니다. 돈도 벌어야 합니다. 이 외적인
것들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이래서 우리는 삶의 재미를 잃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나이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세요. 얼마나 슬퍼 보입니까? 얼마나 지쳤으면 저렇게 병색이 돌까요?
맥이 빠진 것 같지 않습니까? 미소가 없는 그들의 얼굴은 신경증 환자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지 않습니까? 물론 물어 보겠지요. 그러나 묻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대체로 별것도 아닌 설명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나는 서풍에 밀려 돛을 한껏 올린 배가 강 위를 미끄러지는 걸 보았습니다.
아주 큰 배였습니다. 도시로 가는 땔나무를 잔뜩 싣고 있더군요. 해는 지고 있었습니다.
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배는 정말 아름답습디다. 뱃사공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저 키만 잡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배 모는 일을 다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투쟁과 갈등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부림치면서 우리 삶의
순간순간을 소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위의 나이든 사람들을 관찰해 보았다면 알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들 자신, 아내 혹은 남편, 이웃, 그리고 사회를
상대로 하는 줄싸움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이 끝없는 싸움이 그들의 에너지를
소모시켰습니다. 즐거움을 아는 사람,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노력이라는 것에 발목을
잡히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괴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련하다는 뜻도
아니고, 멍청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정말 노력에서, 몸부림에서
자유로와진 사람만이 현명하고 지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노력하지 않는 삶, 유유자적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투쟁도 갈등도 없는 상태를 성취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상으로 삼고 일로 매진합니다.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삶의
즐거움을 상실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시 노력이나 몸부림을 시작한 셈이니까요.
투쟁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투쟁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있고, 신을 찾기 위해, 자신과의 관계, 아내나 남편, 아니면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갠지즈 강둑에서 구루의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구루를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게 노력입니다. 몸부림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투쟁의 목적이 아닙니다. 투쟁 자체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투쟁없는 상태를 자각할 수 있을까요? 어쩌다 잠깐 자각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투쟁에서 자유로와졌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월한 것, 열등한 것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아주 느긋하고 즐거운 상태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의 문제는, 우리 마음이 열등감에 아주 예민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이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 하고, 갖가지 상호 모순되는 욕망의 간극을 메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왜 그렇게 투쟁을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말기로
합시다.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왜 마음의 안팎에 늘 투쟁이 있는지 압니다. 우리의
질투, 탐욕, 야심, 무자비하게 능률을 추구하는 우리의 경쟁심 - 이런 것들이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우리를 몸부림치게 하는 요인들입니다. 우리가 왜 투쟁하는가, 몸부림치는가를
알고 싶다고 해서 심리학 책을 읽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정말
이런 몸부림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따져 보는 일입니다.
우리가 몸부림친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와 '되어야 하는' 상태 및 '되고 싶은' 상태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설명 없이, 몸부림의 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면, 더이상 몸부림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어떻게 하면
몸부림치지 않는 상태를 성취시키느냐,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려는 노력
자체가 이미 몸부림의 한 과정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태는 성취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 끊임없이 몸부림에 휘말리는 순간순간을 관찰한다면 - 상황을 바꾸려고도 하지
말고, 마음을 평화라고 부르는 특정 상태로 몰아 가려고 노력도 하지 말고 그저 실상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 여러분은 마음이 더이상 몸부림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은 엄청난 것을 배웁니다. 이때의 배움이란 정보를 집적시키는 과정이
아닙니다. 마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엄청난 풍요로움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을
발견하는 마음에는 즐거움이 함께 합니다.
자신을 한번 눈여겨보세요. 그러면 자신이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식으로 몸부림치는지, 이
몸부림에서 에너지가 어떻게 소모되는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왜 몸부림치는 지
그것만 설명하면 여러분은 이 설명 안에서 길을 잃고 계속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반면에
설명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관찰하여 몸부림의 본질을 자각하게 된다면, 전혀 몸부림이
없는 상태가 시작되고 있음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투쟁도 없고 몸부림도
없습니다. 오직 놀라운 통찰만 있을 뿐입니다. 이 통찰하는 상태에는 우월한 것도 없고
열등한 것도 없습니다. 거물도 없고 조무래기도 없습니다. 구루도 없습니다. 마음이 깨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미망은 다 사라진 것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은 즐거움을 압니다.
즐거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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