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별관신사 2014. 3. 26. 06:19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인생을 연구하는 데 있어 자기의 생활
의식에 의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기의 외부로부터 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 눈으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기의

외부로부터 보고 있다고 말함과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들이 사물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인생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

속에서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기 눈으로 보는 대로밖에는
사물을 보지 않는다. 또 우리들은 자기 내부에서 아는 대로 밖에는 자기
밖의 생명에 정의(定義)를 내리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을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알고 있다. 따라서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의
정의를 제쳐놓고는 인생을 관찰할 수 없을 뿐더러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생물로서의 우리들 지식의 첫째 가는 주요한 작용은 하나의 생물인

개념(槪念) 속에 여러 가지 것을 많이 포함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생물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도 저것도 그저 우리들 모두에 의해서 똑같이 인정되고 있는 삶의

정의 기초 위에 있어서만이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말 탄 사람을 볼 때에 이것이 여러 생물도, 하나의 생물도
아님을 알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사람과 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을 관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말의 머리에서도, 족(足)에서도,
기타 여러 부분에서도 우리들이 자기 내부에 알고 있듯이 행복에 대한
개개의 희구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또 말 탄 사람이 한 개의

생물이 아니라 두개의 생물임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속에는 그저 하나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알고 있으나, 그를 속에는 두개의
별다른 희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저 이 한 가지 일에 의해서만이 우리들은 승마자와 말과의 결합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 말의 한 떼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 새 곤충 나무
풀에도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말은 말대로

그의 행복을 원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
말 떼 속의 개개의 말도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 개개의 새 개개의
말똥벌레 나무 풀이 모두 자기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생물의 개별성(個別性)을 인정하지도 않고, 생물을
이해할 수도 전혀 없을 것이다. 기병의 1연대도 가축떼도, 새들도,
곤충들도, 식물도, 일체의 것은 바닷물에 보이는 물결처럼 되어

우리들에게는 전 세계가 우리들이 아무리 해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구별 없는 운동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만약 내가 말이나, 개나, 개에 붙어 있는 진드기나, 그 어느 것이라도

모두 생물임을 알고,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저 말에도,
개에도, 진드기에도, 서로 다른 목적, 즉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행복에 대해서 그들과 같은 희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의 나를 알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행복에 대한 희구 속에 인생에 관한 모든 지식의 근저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내부에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한 희구가 생명이며,
제각기 다른 인생의 표시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인생의 여하한 연구도
불가능하고, 인생에 대한 여하한 관찰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관찰은

이미 인생이 명료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인생의 현상에 대한 여하한
관찰도 인생 그 자체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릇된 과학이 상상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식 속에 찾아보는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어서
인생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고, 진드기 속에서 이 희구를 아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진드기가 희구하고 있는 그 행복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 가상적 지식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관찰해 보고, 또 생명의 본질
그 자체에 관한 결론마저도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외적 생명에 관한 나의 모든 개념은 행복에 대한 나의 희구의 의식을

근저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과 나의 생명이 무엇에 있는가를
아는 것만으로서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과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행복이나 생명은 자기의 그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미지(未知)인 것이요. 그리고 또 자신이
동경(憧憬)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알고 있는 그 행복에 극히

유사(類似)한 것 같은 그 자신의 목적을 획득(獲得)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딴 존재자에 대한 관찰, 그러한 관찰은 반복(反復)해 말하거니와 인생에
대한 나의 진정(眞正)한 지식을 속진(速進)시킬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은 나에게서 은폐하는데 역할이 된다.
자기 생활의 정의를 갖지 않고 다른 존재의 생활을 연구함은, 중심이
없이 원주(圓周)를 그리려 함과 매일반이다. 우선 중심으로서 움직일 수

없는 한 점을 정하고 나서 비로소 원이 둘레를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떠한 형태를 그리더라도 중심이 없다면 원의 둘레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