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소음이다. 그러나 여기 다른 것, 더욱 무서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정적이다. 커다란 화재가 났을 경우에는 가끔 이런 극도의 긴장된 순간이 찾아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뿌리던 물줄기도 기운을 못 쓰고, 소방수들도 더는 기어오르지 못하며,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순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커먼 추녀 끝이 소리도 없이 높은 곳에서 앞으로 내밀고
있고, 훨훨 타오르고 있는 불을 안고서 높다란 벽이 소리도 없이 기운다.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이마엔 주름을 짓고 긴장한 채 무시무시한 일격이 가해지는 순간을 서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치 이 도시의 정적도 이런 순간과 같다고 내게는 생각이 들었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나는 보는 법을 배워야 겠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것이 내 마음 속 깊숙이 파고 들어와 여느 때 같으면 언제나 끝장이 나고는 하던 그곳까지 와서도 멎지를 않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깊은 속을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지금 그 깊은 속으로 향해 들어가고 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게는 짐작이 안간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이 세상에 얼굴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숱한 인간들이 이 세상에는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얼굴이다. 그럴 것이, 한 사람이 여러 개씩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여러 해를 가도 한 가지 얼굴만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얼굴은 낡아서 더러워지고 주름살이 생기게 되어 여행 중에 끼고 다니던 장갑처럼 후줄근
히 늘어진다. 그것은 검소하고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깨끗이 씻는 일조차 없다. 그들은 그만하면 좋고도 남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누가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수가 있겠는가? 헌데 그들도 얼굴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 남는 얼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실상 문제라고 하겠다. 그들은 그 얼굴을 간직해 둔다. 모르면 모르되, 자기들의 자
식한테 그 얼굴들을 달고 다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자들이 기르는 개들이 그 얼굴을 달고 밖으로 나다니는 일까지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얼굴은 뭐니뭐니 해도 얼굴이 아니냐.
이와는 반대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재빨리 자기들의 얼굴을 번갈아 달았다 떼었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자들은 언제까지든지 그렇게 얼굴을 뒤바꿀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사십도 채 못되면 그 얼굴도 마지막 것밖에는 남지를 않는다. 물론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얼굴을 아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의 마지막 얼굴도 한 주일이 될까 말까 하면
뚫어지고 구멍이 생겨 여러 군데가 종이처럼 엷어진다. 그러면 점점 밑바닥이 드러나서 그것은 얼굴인지 무언지 모르게 된다. 그들은 그런 얼굴을 달고 세상에 나와 다니는 것이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이 유명한 시민병원은 아주 역사가 오래돼서, 크로비스王 시대에도 이미 이 병원의 몇 개의 침대에서 환자가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은 오백 쉰 아홉개의 침대에서 사람이 죽게 마련이다. 자연히 공장같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보면, 하나하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죽어가지도 못할 지경이다. 문제도 되지가 않는다. 수가 많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다. 제대로 치료라도 받고 죽는다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제 명을 다 살고 죽을 수 있는 이유를 가졌다고도 할 수 있을 부유한 사람들까지도 등한하고 무관심하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져보려는 욕망은 드물게 되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은 자기만의 고유한 삶과 마찬가지로 희귀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사실 준비가 안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람은 세상에 나
와서 한 가지 생활을 발견하고 미리 준비된 생활, 그것을 다만 몸에 걸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싶어하고, 혹은 떠나도록 강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아무런 노력도 필요없이 되었다. - 여보세요, 이것이 당신네 죽음입니다, 선생 - 그렇지요, 사람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덧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병이 가져다 주는 죽음을 죽어갈
뿐으로 조금도 의아심을 갖지를 않을 것이다. (모든 병명(病名)을 알게 된 뒤로부터 어떠한 최후의 결산이라 할지라도 병의 탓이 되었고, 인간을 탓하지는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병에 대해서는 별수가 없다는 태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그 음성의 주인공은 크리스토프 데트레브가 아니고 크리스토프 데트레브의 죽음의 음성이었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 합리화란 '자신의 행위의 진짜 동기를 감추고 이것을 그럴 듯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당화시키는 심적인 메커니즘'을 말한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발언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입장이 다른 보수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안 보고, 말만 가지고 하는 대화라면, 같은 보수주의나 공산주의자끼리라도 이야기가 안 될 것이다. - 하야까와(일반의미론 학자)
* 딱정벌레는 자신이 날아가는 속도를 판정하는 데 겹눈의 하나인 작은 눈에 비친 상(像)이 다음 작은 눈으로 비칠 때까지의 시간차를 이용한다고 한다. 이 원리는 비행기의 대지(對地) 속도계에 이용되고 있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박쥐가 캄캄한 암굴 속에서 고속으로 날면서도 암벽에 부딪치지 않는 것은, 자기자신이 초음파를 발사하여 벽으로부터의 반향을 듣기 때문이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대화하고 교섭하기 쉬운 장소 그것이 즉 다방이다. 대화하기 쉽다는 것은 대화의 촉매같은 작용이 다방에는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선 다방의 무드 조성이다. 실내는 눈부시게 밝지도 않고 또한 바아처럼 어둠침침하지도 않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감정의 고양도 없고 물론 '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선 워밍업으로서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하품도 하고, 팔이며 배며 목을 긁는 사람도 있다. 하품은 근육 중의 근방추를 늘이기 위함이고, 팔,배,목을 긁는 것은 마찰이며, 혈액 순환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워밍업은 왜 하는가? 먼저, 야구장의 불펜은 왜 있나를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피처가 워밍업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야구의 피처가 워밍업을 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전력을 다한 행동은 감정의 고양을 낳게 하고, 그것은 또 '하고자 하는 마음'과 연결된다고도 할 수 있다. - 미우라 유우고 <교섭의 명수>
* 대기의 하나하나의 성분 속에는 확실히 무시무시한 것이 숨어 있다. 그것은 숨을 쉴 때마다 투명한 공기와 더불어 스며들어가고- 그것이 체내에 스며들어가 침전(沈澱)되고 굳어져서, 기관과 기관 사이에 날카로운 기하학적인 도형 같은 것이 생기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형장(刑場)이나 고문실, 혹은 정신병원이나 수술실 같은 데 아니면, 늦은 가을, 철교의 아아치 아래서
빚어지는 고통과 공포감은 악착스럽고 끈덕지게 달라붙어 어디나 배어들고, 마치 모든 존재하는 것을 질투라도 하는 듯, 그 무시무시한 현실에 집착하여 떨어질 줄 모른다. 그런데 인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잠은 머리 속에 깃들인 그런 공포의 흔적을 고요히 깎아 내리곤 하였지만, 악몽은 그 잠마저 내쫓고, 다시금 옛날의 마음의 상처에 아로
새겨진 그림자를 더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잠을 깨고 허덕이며 어둠 속에 한 가닥 촛불을 들어, 그 희미한 불빛 속에 안도의 숨을 내리쉬고, 마치 꿀물이라도 들이마시듯, 그 희미한 촛불이 주는 위안을 들이켜는 것이다. 아니, 대체 인간의 마음의 안정은 어떤 모서리를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도 불안한 공포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낯익은 것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정들었던 것이 다시 나타나니 말이다. 한 가닥 촛불이 그다지도 위안을 줄 수 있는 윤곽을 회색빛의 어둠을 제압하고 뚜렷이 드러내 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방안을 더욱 공허하게 만드는 불을 삼가야 했다.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나의 등 뒤에 명령이라도 내릴 듯 주인처럼 나의 그림자가 서 있다고 해서 이제 돌아다 볼 수도 없다. 나는 오직 어둠 속에 가만히 앉
아서, 한정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그대로 암흑 속에 모호하게 잠긴 주위의 온갖 물건이 발산하는 무거운 공기와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속에 나를 몽땅 끌어들이고, 내가 보고 있는 눈앞에서 나의 몸은 나의 손 안에서 슬그머니 없어져 버리는 것 같다. 가끔가다 생각난 듯 나는 확실치 않은 동작으로 나의 얼굴을 더듬어 본다. 나는
거의 공간이란 것을 상실한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마음속의 이 비좁은 공간에 무시무시하게 큰 것이 들어 앉아 있다는 것에 나는 만족감을 가진다. 나의 마음속에 터무니도 없는 것이 생겨, 주위 환경의 사정으로 억눌리어 할 수 없이 쭈그러든 것이 웬일인지 대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은 망망하고 끝도 없는 것이 퍼져 있다. 그리고 그 밖에서 물이 불어나면 나의 내부에도 역시 물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맥관(脈管)이나 혹은 나의 평온한 기관(器官)들의 분비물이 저절로 물이 불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모세관(毛細管) 근처가 점점 부풀어서 나의 생명이 수 없이 갈라져 나간 그 맨끝 가지 속으로 맥관을 통하여 무
엇인지 자꾸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심정이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렇게 치밀어 올라온 것이 더욱 나를 치받고, 내가 최후의 거점으로 알고 도망쳐 가는 호흡마저 막히게 하는 것이다. 아,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대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나의 마음은 나를 밀어낸다. 나의 마음은 나를 놓치고 홀로 뒤떨어진다. 나는 나의 밖으로 밀려나와 버리고 다시는 되돌
아갈 수가 없다. 발길에 짓밟힌 집게벌레에서 흩어지는 피처럼 나는 나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외피(外皮)나 적응력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마는, 그것이 이제 와서 무슨 의의가 있느냐 말이다.
- R.M.릴케 <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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