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이 폭력의 문제는 저기 있는가

별관신사 2014. 11. 12. 07:20

폭력의 문제는 저기 있는가, 아니면 여기 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깥 세계에서
풀려고 하는가, 아니면 당신 속에 있는 그대로의 폭력 자체를 묻고 있는가? 만일 당신
스스로가 폭력에서 해방되어 있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나는 이 폭력, 욕심, 탐욕,

질투, 잔인성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 나는 파괴되지 않을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질문되는 불가피한 질문이다.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내 생각에 당신은 사실상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다. 만일 당신이 평온하게 산다면, 당신은 아무런 문제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군대 가는 걸 거부하기 때문에 감옥에 갈는지도 모르고 전투를
거부하기 때문에 총살당할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다. 즉 당신은 총살당할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우리는 폭력을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바, 사실이란 인간 속에
존재하는 사실을 말하며, 그리고 인간이란 나 자신이다. 또 문제를 파고 들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되며 상처 입을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나를 나

자신에게 드러내야 하며-나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흥미가
없을는지도 모르니까-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끝까지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중단하여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나는 난폭한 인간이라는 게 분명할 것이다. 나는 분노하면서 난폭을 체험했고,
성적 요구에 있어서의 폭력, 증오와 적대감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폭력, 질투에 있어서의 폭력

등을 체험했다-나는 그걸 체험했고, 그걸 알았고, 그리고 스스로 말한다. <나는 이 전문제를
이해하고 싶은데, 전쟁에서 표현된 단 하나의 단편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이 공격성-동물
속에도 있으며 나도 그것의 일부인-공격성을 이해하고 싶다.>

폭력은 다만 타자를 죽이는 게 아니다. 남의 아픈 데를 찌르는 가시 돋친 말을 할 때, 어떤
사람을 쓸어버리는 제스처를 쓸 때, 공포 때문에 복종할 때, 그건 모두 폭력이다. 그러므로
신의 이름으로 조직된 도살장만이 폭력은 아니다. 폭력은 보다 더 교묘하고, 한결 깊은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폭력의 바로 그 깊이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인도인이라거나 유럽인이라거나, 혹은 그 어떤 것으로 부를 때 당신은
폭력적이다. 그게 왜 폭력적인지 아는가? 당신이 자신을 그 외의 모든 인류로부터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신념, 국적, 전통에 의해 분리할 때, 그것은 폭력을 키운다.
그러므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날, 어떤 종교, 어떤 정당이나 편파적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다-그는 인류에 대한 전적인 이해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폭력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는데,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본래 타고 난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폭력은 인간이 그 속에서 사는
바의 사회적 문화적 유산의 결과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파에 속해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이지, 왜
폭력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