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트라 비전(tantra vision)

인간의 전체의식은 그 차원이 어떠하든지 제3의 법칙으로 되어있다.

별관신사 2016. 4. 22. 19:57

그리고 aum은 이 제3의 법칙의 상징이다. 그대는 그것을 원자의 소리라고
부른 수 있다. 이 세가지 소리는 소리에 관한한 가장 절대에 가깝다. 그것은
최소한의 분석단위이다. aum은 존재계의 경계선이다. 이 세가지를 넘어선

곳은 우리에게 있어서 미지와 절대 영역이다. 물리학자들은 우리의 분석한계가
전자에까지 이러렀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자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소립자이기 때문이다.

전자를 넘어선 곳에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자를 반물질이라고
부른 수는 없다. 전자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전자를 본 사람은 없다. 그것은 물질이라고 무를 수 없는 상황의 것이기 때문

이다. 그것은 수시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확률을 통해 그것의
위치를 점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전자는 경계선위에 있다.
aum은 소리에 관한 한 경계선이다. 그대는 aum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인도에서만 사용되는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다. 기독교와 이슬람
교에서는 아멘아라고 부른다. 그것은 옴과 같은 것이다. 영어에 옴니(omni)라는
접두어가 있다. 그것도 바로 옴에서 나온 것으로 절대 궁극 전체의 의미를 갖고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기도를 한 뒤에 아멘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완전히 과학적인 방편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소리를
초월하려는 방법을 벌견했다. 만악 마음이 소리라면 그때 무심은 소리없음이

된다. 물론 소리없음은 소리의 충만과도 퉁하는 말이다. 절대는 항상 두가지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 역시 그정과 부정의 두가지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대는 절대성을 적접 표현할 수는 없다.

없다. 그것은 항상 상징적으로만 표현된다. 예를 들어 붓다는 부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소리없음 이라고 말했다. 그는 절대로 소리의 충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긍정의 방식을 사용한다. 탄트라는 소리의

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붓다는 절대성을 쑤냐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무 혹은 공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우파니샤드는 절대성을 브라흐만
아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편재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둘 다 같은것을 표현

하고 있다.

탄트라 강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