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역사의 초창기에 비교적 덜 알려진 하나의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에 발흥하여
일천오백년 가까이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인더스 문명
또는 하라파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명의 중추를
이루었던 것은 헤라파와 모헨조다로라는 두 도시였다.
두 도시의 전체 인구는 야구 8만명이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많은 인구였다. 이 문명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는 왕궁이나 신전 따위가 발견되지
않는 대신 치밀한 도시계획이 두러져 보인다.
시가지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대로를 주축으로 바둑판 모양
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인류역사를 통털어 가장 먼져 설계된
수로와 하수도 망이 갖춰져 있었다.
이 문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현재로써는 누구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수메르 문명에서 그 기원을
찿는다. 서쪽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을 피해 인더스강 유역으로
온 수메르 인들이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 문명이 사라진 이유 역시 오랬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최근들어 수천구의 시신과
하라파 시대의 물건들이 묻혀있는 구덩이가 발견되고 고고학자
들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하라파인들의 역사가 점차로 재구성
되기에 이르렀다. 하라파인들은 견고한 성벽을 건설함으로써
외적의 잇단 침입에 저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의 안전이
어느정도 확보된 가운데 그들은 특별한 문자와 예술과 아주
세련된 언어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문자 가운데 수백개의
그림글자가 알려져 있지만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민족이였다. 그들은 여러가지 경제활동으로
풍요를 누렸다. 명화를 재배하여 이웃민족들에게 팔았을 뿐만
아니라 구리나 석회암이나 보석등으로 그릇이나 장신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들이 수출한 청금석은 그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그 교역로는 이집트까지 닿아있었다.
파라오들의 관에서 청금석을 만든 물건들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이 그점을 말해준다. 그런데 아리아인들은 하라파를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다가 실패한 후에도 도시 주위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어가자 하라피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적의가 사라졌다고 판단하고 집과 도로와 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력으로 그들을 고용했다 그리하여 하라피인들의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아리아인들의 노동계급이 생겨났다.
그들은 당시의 노예제 관습에 비추어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은 자식을 훨씬많이 낳는 아리아인들의 편이였다.
아리인들의 후손들은 이내 강력한 패거리를 지어 도시 주위에
공포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역로를 오가는 대상들을
공격했고 도시를 점차로 파괴했다. 도시안에 살던 이리아인들은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들자 내전을 일으켰다.
그들은 결국 하라파인들을 붇잡아 커다란 구덩이 앞에 모은
다음 모두 죽여서 한데 묻어버렸다. 하라파의 모헨조다로를
약탈한 아리아인들은 도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몰락해 가도록 방치하다가 결국을 도시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그들 뒤에 남은 것은 유령도시들과 시신으로 가득찬
구덩이들 뿐이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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