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이야기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하라. 스토아 학파.

별관신사 2012. 11. 3. 02:02

에페쿠로스 학파의 탁월한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우발성의 우주론을
주장했을 때 사실 그는 인간의 삶과 행복에도 우발성의 관념을 도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따르면 우주 탄생은 평행으로

내려오는 원자들 가운데 어떤 하나의 클리나멘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작은 기울임이 발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떤 외부 존재와 우발적으로 마추쳤을 때에만 쾌감이나 불쾌를

느낄 수 있다. 비록 오늘은 불쾌하지만 내일은 쾌감을 느낄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가 공유했던 중요한 관점이였다.

그런데 헬레니즘 철학을 양분했던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게 초 폰 아르님은 초기 스토아
학파의 어록을 네권의 칙으로 묶었던 적이 있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흥미 진진한 구절이 등장한다.

모든 윈인의 결과를 지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면 어떤것도 그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미래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일어날 모두를 분
명히 파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경과는 줄을 다시푸는 것과 같으며
새로운것을 만들지 않는다. (처기 스토아 학파의 답변)

돌돌 말린 실패를 연상해 보라. 스토아 학파는 세계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마치 실패로부터 실을 푸는 과정과 같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실을 완전히 풀면 우리는 실 중간 부분에 노랗게 염색된 부분이 있다는

것 혹은 전체 실의 길이가 얼마나 된다는 것 등을 모두 알 수 있다.비록 우리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 실을 완전히 풀기 전에는 전혀 알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것은 이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핵심적인

견해였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가 철저한 인과관계 혹은 인과적 질서에 의해
발생하고 움직인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윈인을 알게
되면 결국 이 원인에 따른 결과 역시 미리 다 알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정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났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달리
스토아 학파는 이처럼 완전한 결정론을 믿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