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죽음의 공포는 풀기 어려운 인생의 모순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별관신사 2014. 3. 13. 06:29

「죽음은 없다」고 진리의 목소리는 외친다. 「부활(復活)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고 살 것이다. 무릇 나에게서 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는 일이 없다. 너희들은 이러함을 믿느냐?」

「죽음은 없다」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인생의
의의를 이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또 스스로의
생활로써 그것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의식이 분명한 순간에 있어서는 그 영혼 속에서 그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을 보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어찌 죽음이 없을 것인가?」라고 그들은 분연(忿然)히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궤변(詭辯)이다. 죽음은 우리들 눈 앞에 있다. 죽음은

수백만의 인간을 쓰러뜨렸다. 우리들을 역시 쓰러뜨릴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죽음이 없다고 우겨대도 죽음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그래,
이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정신병자가 그를 위협(威脅)하는 환영(幻影)을 보는 것과도 같이 그는 그
환영에 손을 댈 수는 없다. 환영은 일찌기 한번도 그에게 손을 댄 일도

없다. 환영이 품은 목적에 대해서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가상적(假像的) 환영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한 나머지 생명의
기능마저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의 경우도 이것과 이치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고 또 결코 그것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죽음은 아직 한번도 나를 사로잡은 일이 없으나 어느 땐가 사로잡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나를 사로잡아서 멸망시켜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섭다」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릇된 인생관을 품고 있는 자가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어서
그들이 인생에 대해서 품고 있는 관념의 근저를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만물 속에

부단히 생기고 있음을 내가 목격하고, 또 내가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변화가 나의 육체적 생존에 나타나는 일에는 아무런 불쾌한 일이나 두려운
일도 없다는 결론으로....... .

나는 죽는다. 거기에 무슨 두려운 일이 있으랴? 첫째로 나의 육체적
생존 속에는 일찌기 어느 정도의 변화가 생기고, 또 현재도 생기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하거늘 나는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이 변화를
두려워할까? 게다가 이 변화 속에는 나의 이성이나 경험에
거역(拒逆)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나에게는 생애를 통해서 내가

끊임없이 나의 공상 속에서 동물의 죽음이든 인간의 죽음이든 죽음은
생명의 필수적인 것이며 때로는 편리한 조건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왔고,
현재도 역시 생각하고 있을 만큼 알기 쉬운 친근성이 있는 자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이론적인 인생관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따름이다. 그
하나는 거짓의 인생관이어서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나의

육체에 생기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인생으로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둘 다 마찬가지로 이론적이고 사람은 그 어느
쪽을 취하든 자유이나, 어느 쪽이든 죽음의 공포는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첫째를 보면, 인생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육체의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 해석하고 있는 거짓된 견해는 세계의 현상처럼 오랜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현재의 유물적 과학(唯物的

科學)이나 철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관은 아니다. 현대의 과학과
철학은 그저 이 견해를 그 극한에까지 추진(推進)시켰을 뿐이고, 그
결과로서 이 견해가 인간의 자연적인 근본 요구에 대해서 적합하지 못하게

되었음이 한층 명료(明瞭)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양의
최저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극히 낡은 원시적 견해(見解)이다. 그것은
중국인 사이에도 불교도 사이에도, 유태인 사이에도,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잠언(箴言) 속에도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견해를 실제의 말로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인생, 이것은 공간과
시간에 나타난 물질력의 우연한 장난이다. 우리들이 의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 그 의식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어떤
종류의 감정의 기만(欺瞞)이다. 의식이라 함은 물질의 일정한 상태
아래의 그 속에서 번쩍이는 불꽃이다. 이 불꽃은 타올라 한창 타고 다시

어두워져서 마침내는 아주 꺼져버린다. 이 불꽃, 즉 두 개의 시간적 무한
사이에 있어서 일정한 시간 동안만 물질에 의해서 경험되는 의식은 본디
무(無)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보고, 무한의 세계를 보고, 자기 자신

및 무한의 세계를 판단하고, 이 세계의 모든 우연의 장난을 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어떤 우연하지 않은 것에 대조시켜서 이 장난을 우연이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단순히 죽은 물질의

산물이고, 하동의 흔적, 하등의 의의를 남기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곧
꺼져버리는 환영이다. 일체는 한없이 변화하는 물질의 소산(所産)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단순히 죽은 물질의 일정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인생에 대한 하나의
견해이다.
이 견해는 아주 논리적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합리적 의식은

물질의 어떤 상태에 따르는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자기의 의식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죽은 것 뿐이다. 우리들이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죽음의 장난이다. 이와 같은
인생관에 따르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것만이 아니고, 삶이야말로
부자연하고 불합리한 것으로서 두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마치 불교도나

신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나 할트만 등이 보고 있듯이.
인생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생이란 그저
내가 내 자신 속에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생명을 내가 과거에 있었다든가 또는 장래에 있을 것이라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나는 현재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끝날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의식하고 있다. 나의 생명의 의식에는 시간 및 공간의
관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연 이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이 반대가
된다. ―생명의 의식이 환영이 아니라, 모든 공간적인 것, 시간 적인

것이 환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생존은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휴지(休止)는 이 견해에 있어서는 아무런 실제적인 의의가 없고, 나의
참된 생명을 중단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환할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에 있어서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생관 중 그 어느 것이라도 사람들이 굳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어느 쪽에도 죽음의 공포는 있을 리 없다.

동물적 존재라하더라도, 또 합리적 존재라 하더라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까진 없다. 동물은 삶의 의식을 갖지 못하므로 죽음을 보는
일도 없는 것이지만, 합리적 존재는 삶의 의식을 갖지 못하므로 죽음을

보는 일도 없는 것이지만, 합리적 존재는 삶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물아의 죽음에 있어서는 자연스럽고 결코 그칠줄 모르는 물질적 운동
이외에는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 동물적 존재도, 합리적
존재도, 다 같이 그것만을 알고 있는 삶이다.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로
나타나는 감정은 그저 삶의 내적 모순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도깨비에 대한 공포가 병적 정신 상태의 의식에 지나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것이리라. 내가 나의 생명이라

보고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될 것이리라」고 어떤 목소리가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그리고 죽을
수는 없으며, 또 죽어서는 아니된다. 나는 죽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죽어가고 있다.」
죽음 속에서가 아니라, 이 모순 속에서 육체의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을
사로잡는 공포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이 그 동물적

생존의 휴지를 두려워하는 일에 있음이 아니라, 죽을 수 없는 또 죽어서는
안 될 것이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생각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장래의 죽음에 관한 사상은 그저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의 관념을

미래에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래의 육체적 죽음으로서
나타나는 환영은 죽음에 관한 사상의 깨우침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가져야 할 터인데 가지고 있지 않는 삶에 관한 사상의 깨우침이다.

이것은 무덤 속에서 삶에 깨우친 사람이 경험해야할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다. 생명은 있다. 그런데 나는 죽음 속에 있다. 이것이
그것이다. 죽음이다. 즉 현재 있는 것, 있어야할 것이 멸망되어 간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知慧)는 헝클어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죽음에서의 공포가 아니라 거짓된 삶의 공포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인간이 때로는 죽음의 공포에서 자살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이라는 관념을 두려워함은 그들의 생명이 그것과
더불어 끝남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이 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참된 생활의 필성(弼成)을 분명히 가르쳐주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들이 합리적 의식의 요구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지

않다 함을 고백함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그것을 두려워함은 죽음이 그들에게 공허와
암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허와 암흑으로 보는 것은

그들이 삶을 보지 않기 때문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