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인 덕은 그 어느 것이나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치고 그 본성에 반대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것은 <에티케>(도덕적, 윤리적)라는 말이 <에토스>(습관)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도덕적인 덕들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습관에 의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덕은 인간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착한 습관을 통하여 먼저 실천함으로써 생긴다. 즉, 집을 지어봄으로써 건축가가 되고, 거문고를 탐으로써 거문고 타는 악사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
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성품은 제 각각 거기에 대응하는 활동에서 생기는 것으로서 행위가 성품을 결정하는 까닭에 우리는 옳은 규칙에 따라서 행위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나쁘게 되는 것은 쾌락과 고통 때문이다. 즉 이것들을 추구하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추구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되는 쾌락이나 고통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며, 혹은 추구와 회피의 때를 잘못 잡고, 혹은 그릇된 방법으로 추구 내지 회피하고, 혹은 이 밖에 이와 비슷
한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덕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에 관하여 최선의 행위를 하기 마련이고 악덕은 이와 반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덕과 정치학의 온 관심사는 쾌락과 고통이다. 이것들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것이고, 잘못 처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 것
이다. 그러므로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계되고,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행위에 의하여 덕은 조장되고 그렇지 않은 행위에 의하여 상실되며, 그리고 그것을 생겨나게 한 행위는 덕이 그 속에서 스스로 활동하는 행위이다.
무릇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기능을 잘 발휘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덕은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
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 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과도와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 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받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中庸)이다. 그것은 두 악덕, 즉 과도로 말미암는 악덕과 부족으로 말미암는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덕은 그 본체에 있어서나 그 본질을 밝히는 정의에 있어서 하나의 중용이요, 최선이라든가 옳다고 하는 점에서는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중용으로서의 도덕적인 덕에는 용기, 절제, 관후, 긍지, 정의 등이 있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의 중용이요, <절제>는 금욕과 방종의 중용, <관후함>은 인색과 낭비의 중용, <긍지>는 비굴과 오만의 중용이다. <온화>는 성마름과 성질없음의 중용이요, <진실함>은 허풍과 거짓겸손의 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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