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창발사회론 (6) 작은 시도, 큰 기쁨|

별관신사 2013. 1. 25. 21:17

- 경남 통영시 동피랑

 

     "새끼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저 온다꼬 욕봤지예! 짜다리 멜볼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 (어서 오세요. 동피랑 언덕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별 볼거리가 없어도 마실 다니듯이 천천히 둘러보세요.) 동피랑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이다.

 

     통영 사람들은 콧대가 높다. 여기가 바로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았던 곳이고,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곳이다. 한산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에 어우러져 민, 관, 군이 하나 되어 이룬 세계 해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승전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러한 통영사람들의 자부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할 것이다. 통영이라는 도시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곳이다 보니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이곳을 그냥두지 못했다. 다른 유적이나 유적지는 그대로 두더라도 이순신 장군이 집무하던 삼도수군통제영 건축물은 흔적도 없이 뭉개버렸다. 당시의 통제영 건물 가운데 살아남아 현존하는 것은 객사인 세병관 뿐이며,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와 수항루를 지나 우측에 있는 두룡비 기사비(경남유형문화재 112)와 비각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모든 것을 복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는 통영의 대표적 성지가 된 이순신 공원을 만들고, 이순신 동상을 세웠으며, 통영 한산대첩 축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자원은 통영을 관광명소로 거듭나게 하는 데 일조했고,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하자 시민 소득에도 보탬이 되었다.

 

     통영시는 통영 해변에서 올려보이는 동포루를 복원하고 싶었다. 동포루는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감시하기 위하여 쓰던 동쪽 망루였다. 복원하면 통영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동피랑 마을이 있었다. 동피랑은 동쪽 벼랑을 뜻하는 통영 사투리다. 마침내 통영시는 동피랑 마을을 헐고 그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고 동포루를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관광자원은 시민의 소득증대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역사적 명분도 살리고 관광소득 증대라는 실리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피랑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잃는 것에 반대했다. 여차하면 철거용역이 투입될 판이었다.

 

     그 때 누군가 이러한 소식을 알리고 동피랑 마을에 벽화 그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반응은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나왔다. 전국 대학의 미대생들과 화가들이 몰려들어 동피랑 마을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비탈의 달동네가 벽화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동피랑은 졸지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제 동피랑을 방문하기 위하여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 통영을 찾아 동피랑을 둘러보는 사람들보다 많다. 

 

     통영시는 동피랑 꼭대기의 집 3채만 헐어 동포루를 복원했다. 동피랑 주민도 살고, 이순신 장군의 망루 동포루도 살았다. 이러다보니 관광자원은 그 이전의 몇 배로 늘어났다. 하루 500명에서 5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동피랑 마을에 오르고, 지금도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와 동피랑 마을 벽에 그림을 그린다. 바다와 동피랑. 통영은 동양의 나폴리를 말한다. 한국의 몽마르뜨를 말하기도 한다. 이제 그래도 될 것 같다.

 

     창발이다. 이러한 창발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관官 주도의 정책적 끼어듬도 가세했다. 거제 구조라 벽화마을, 부산 해운대 벽화마을, 대구 마비정 벽화마을, 서울의 이화마을, 경북 읍천항 벽화마을, 강원도 묵호 등대오름길 벽화마을, 충북 청주 수암골 벽화마을, 경기 군포시 벽화마을, 전남 광주시 혜화 벽화마을, 전남 여수 벽화마을, 전북 고창 벽화마을, 제주 두멩이 올레길 벽화마을....

 

     벽화 뿐 아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달동네는 예술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달동네를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옆 담벼락 위에는 형형색색의 조그만 공룡들이 올라 앉아 아이들의 등교길을 지켜주고 있고, 그 중간쯤 있는 노란 벤치는 쉼자리에 더하여 운치를 선사한다. 어느 집 담 안쪽에서는 수풀이 담벼락을 넘어나오는데 바깥 담벼락에는 빨강, 파랑, 노랑의 커다란 도룡뇽이 붙어있다. 우리 주변이 아름답게 아름답게 예술화 되어가고 있다. 물론 관官 주도의 흉내내기가 너무 널리 퍼져 판박이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 하나의 창발이 특성화 되지않고 지나치게 일반화되는 것에는 부담이 따르지만.

 

 

- 서울 신사동 가로수 길

 

     미국 LA에 로데오 드라이브가 있다면 서울 강남에는 로데오 거리가 있다. 1990년대 초, 기존의 질서나 가치로부터 탈출하려는 젊은이들이 몰려 LA 비버리힐스의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따 이 거리를 압구정 로데오 거리라 부르면서 유명해졌다. 한 때 이 거리는 소위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부유층 자네들에게 점령 당했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고, 그들만의 압구정 로데오에서 우리들의 압구정 로데오로 변모했다. 로데오 거리의 모든 것은 젊은이들이 만들고 변모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압구정 로데오 거리 역시 하나의 기성권으로 인식되자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그들만의 주머니 사정으로 접근 가능하면서 트랜디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새로운 거리를 만들었다. 서울 신사동의 가로수 길이 그러하다. 처음에는 우중충한 건물들로 인하여 임대료가 싼 것을 기화로 젋은 화가들과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이더니, 그 다음에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들어서고, 그 다음에는 패션샵이 오픈했다. 얼마 지나자 거리는 완전히 변했다. 젊은이들이 일부러 찾는 거리가 되었다.

 

     새로운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신사동 가로수 길 변화의 주역은 누구일까? 서울시나 강남구청의 많이 배우고 머리 좋은 개발정책 입안자들이 이 변화의 주역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나 둘 모여든 화가와 패션 디자이너들이, 커피샵과 패션샵들이, 그리고 거기에 모여든 젊은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 나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건물주들도 신이 났다. 무엇을 더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하고 시장의 Need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모든 것이 자발적이다. 도시개발 정책 부서나 지역구 국회의원 나으리 등 높은 사람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오히려 그런 나으리들이 나서서 '감 놔라, 떡 놔라' 하는 순간 복잡계는 틀어져버린다. 강남구가 정말 잘 한 것은 그들이 변화하도록 관찰하면서 Need가 발생하면 도와주는 것 이었다. 전형적인 바텀업(Bottom→Up)으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났다. 이런 것이 바로 창발이다.

 

<참고> 새로운 형태의 소小지역 언론 창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뒷골목에는 '영재문구'라는 가게가 있다. 영재(英才)라는 뜻이 아니다. 주인 아들 영웅이와 재웅이 앞글자를 딴 간판 이름이다. 인근 가방 판매점 '르 벡소(le verso)'는 프랑스어로 '뒷면'이라는 뜻. "겉뿐 아니라 뒷면(속)까지도 심혈을 기울인 장인정신"을 구현하겠다는 프랑스 유학파 디자이너 마음이 담겼다.
     지난 5월 10일 나온 헬로 가로수길 10호는 가로수길 가게 80여 곳의 이름 유래를 두루 살폈다. 구석구석 놓인 가게들 이름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그 속에 담긴 동네 사람들 삶을 풀어놓았다.
     지난 2008년 11월 처음 나온 '헬로 가로수길'은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만드는 '풀뿌리 잡지'다. 잡지사 출신인 카페 'WASH' 배정현(39) 사장이 인근 사무실과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전문가들과 의기투합, 큰 잡지에서 다루지 않는 소소한 동네 소식을 전하겠다고 시작했다. 사진관 사장은 사진을, 디자인 회사 대표는 일러스트를 맡았다. 창간호로 1000부를 무료로 나눠줬는데 "동네 소개에 동참하겠다"며 하나 둘 기자를 지원하는 이웃이 몰렸다. 반응이 좋자 기업들 후원이 뒤따랐고, 발행 부수가 2만부까지 늘었다.
     '헬로 가로수길'처럼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뿌리는 '풀뿌리 잡지' 바람이 불고 있다. 전에 있던 지역 신문들이 자치구나 서울시 정책을 주로 소화했다면, '풀뿌리 잡지'는 주변 이웃 생활 속 자잘한 이야기를 에누리 없이 담고 있다.

     매달 15일 마포구 홍대 주변 소식을 전하는 스트리트 H는 홍익대 곳곳의 문화이야기를 기록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잡지 기자 출신 장성환(48)·정지연(41)씨 부부가 2009년 6월 창간했다. 최근 '홍대 앞에서 꼭 해봐야 할 36가지'를 주제로 3주년 특집판을 펴냈는데 "해외 유명 뮤지션 내한공연이 있는 날, 새벽 곱창 골목을 찾으세요. 그들의 뒤풀이 자리에 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닐봉지 칵테일을 입에 물고, 정문 앞 놀이터 공연을 구경해 보는 건 어떨까요?" 등을 내용으로 실었다.

     종로구 청운동·효자동·사직동 일대 서촌 모습을 담은 서촌라이프는 유명 맛집과 일부 명소 소개를 벗어나 서촌에서 벌어지는 옆집 이야기, 앞집 사연을 녹이는 데 주력했다. 예비사회적기업 안테나에서 매달 3000부씩 발행하는 문래동네는 영등포구 문래동 주민 생활과 문래창작촌 사람들 이야기를 담은 동네 문학잡지다. 문래창작촌 작가 인터뷰, 전시·공연 리뷰, 각종 지역 행사 등을 실었다.
     노원구 월계동 루나피플뉴스는 아파트단지 주민들이 만든 아파트 소식지다. 주민들 숙원사업, 지역 문화재 유래와 숨겨진 이야기 등을 담아 지난 10일 창간호 5000부를 배포했다. 분기별로 정기 발행할 방침. 지난해에 이어 올해 2호를 낼 예정인 도란도란 충현동은 서대문구 충현동 자치회관 주민들이 모여 만들었다. 15명 남짓한 주민 기자들이 동네 명소와 유명 인사 등을 소개한다. 주변 구멍가게들이 '스폰서'를 자원했다. (조선일보 2012.08.23 풀뿌리 잡지가 뜬다)

 

    

-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의 법칙과 뉴욕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L. Kelling)은 1982년 3월에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이론을 공동 발표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주변의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어떤 지점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볼 때 부정적인 복잡계도 얼마든지 확산될 수 있다.)

 

     이 이론은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실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우선 치안이 비교적 허술한 골목에 보존 상태가 동일한 두 대의 자동차를 보닛을 열어 놓은 채로 1주일간 방치해 두고 결과를 관찰한 실험이었다. 두 대 중 한 대는 보닛만 열어 놓고, 다른 한 대는 고의적으로 창문을 조금 깬 상태로 놓았다.

 

     유리창이 깨어져 있다는 약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인데, 1주일 후, 두 자동차에는 확연한 차이가 나타났다. 보닛만 열어둔 자동차는 멀쩡한 반면, 보닛을 열어 놓고 차의 유리창을 깬 상태로 놓아둔 자동차는 그 상태로 방치된 지 겨우 10분만에 배터리가 없어지고 연이어 타이어도 전부 없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낙서나 투기, 파괴가 일어났고 1주일 후에는 완전히 고철 상태가 될 정도로 파손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회 부정적인 복잡계의 출현이다.)

 

     1980년대, 뉴욕 시에서는 연간 60만 건 이상의 중범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여행객들 사이에서 ‘뉴욕의 지하철은 절대 타지 마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뉴욕 시의 치안은 형편 없었다.

 

     미국의 라토가스 대학의 겔링 교수는 이 ‘브로큰 윈도우’ 법칙에 근거해서 뉴욕 시의 지하철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하게 지우는 것을 제안했다. 낙서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는 창문이 깨져 있는 자동차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통국의 데빗 간 국장은 겔링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치안 회복을 목표로 지하철 치안 붕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낙서를 철저하게 청소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범죄를 줄이기 위해 낙서를 지운다는 제안에 대해서 교통국의 직원들은 우선 범죄 단속부터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물론 당연한 반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서도 문제지만, 우선은 그런 작은 문제보다는 큰 문제인 흉악한 중범죄 사건을 어떻게든 빨리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간 국장은 낙서를 지우는 것에 집중했다. 지하철 차량기지에 교통국의 직원이 투입되어 무려 6000대에 달하는 차량의 낙서를 지우는,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작업이 수행되었던 것이다. 낙서가 얼마나 많았던지, 지하철 낙서 지우기 프로젝트를 개시한 지 5년이나 지난 뒤에야 모든 낙서 지우기가 완료되었다.

 

     낙서 지우기를 하고 나서 뉴욕 시의 지하철 치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까지 계속해서 증가하던 지하철에서의 흉악 범죄 발생률이 낙서 지우기를 시행하고 나서부터 완만하게 되었고, 2년 후부터는 중범죄 건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94년에는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뉴욕의 지하철 중범죄 사건은 놀랍게도 75%나 급감했던 것이다.

 

     그 후, 1994년 뉴욕 시장에 취임한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은 지하철에서 성과를 올린 범죄억제 대책을 뉴욕시 경찰에 도입했다. 낙서를 지우고, 보행자의 신호 무시나 빈 캔을 아무데나 버리기 등 <경범죄 단속>을 철저하게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범죄 발생 건수가 급격히 감소했고, 마침내 범죄 도시의 오명을 불식시키는데 성공했다. (네이버 블로거 daey, hobacssy님의 글에서 일부 인용) 사소한 질서의 힘이다.

 

  

- 한국인구 5000만, 뉴욕 관광객 5200만

    

     예전에는 뉴욕의 할렘 근처 거리를 지나려면 상의 윗주머니나 바지 주머니에 현찰 5~20달러는 반드시 챙겨다니라는 말이 있었다. 행여 강도를 만나면 자신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현찰을 꺼내 주라는 자세한 주의사항도 따라다녔다. 총알에는 지문이 없기 때문에 살해당하면 자신만 억울하다는 것이었고, 그런 강도는 너무 많았다. 

 

     그러나 줄리아니 시장의 활약으로, 사실은 '사소한 질서의 힘'의 승리로, 치안이 회복되었다. 치안이 회복되자 뉴욕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2012년 뉴욕의 관광객은 5200만명을 넘어섰고, 경제효과는 무려 약59조원에 달했다.

 

     브라질 삼바 축제의 경제효과가 2~3조원 정도, 최근 세계로 퍼져나가는 우리나라 '한류'의 경제효과는 5조원 규모(2012년)임에 비추어 볼 때, 뉴욕시의 경제효과 59조원은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또한 최근 급격히 늘어난 우리나라의 외국인 연간 방문객은 1000만명 수준이고, 프랑스 파리의 연간 관광객은 3000만명 정도다. 도대체 인구 800여만 명에 불과한 뉴욕시의 무엇이 이렇게 사람을 불러 모으는가.

 

  <참고> 지난해 뉴욕시를 방문한 관광객이 한국인구보다 많은 5천만명을 넘어섰다. 뉴욕시가 새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뉴욕을 찾은 관광객은 사상 최대인 총 5200만명으로 2011년보다 2.1%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이중 내국인 관광객은 4100만명이고 해외 관광객은 1100만명이다. 또한 한국인 관광객은 사상 처음 30만명이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시가 관광객 방문을 통해 거둬들인 직접 수입은 369억 달러이고 경제효과는 553억 달러(약 59조원)에 달했다. 호텔은 모두 2900만실의 방이 팔린 가운데 총 수입이 5억400만달러이며 호텔종사자 35만6천명의 평균 수입은 5만2천달러라고 밝혔다.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은 “뉴욕시는 독창적인 문화와 음식, 예술, 공원과 쇼핑 등을 통해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오고 싶어하는 도시”라면서 “2015년까지 5500만명 관광객에 700억달러(약 74조원)의 수입을 올리도록 밀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뉴욕시의 지난해 외국인 방문객 통계 자료에 따르면 뉴욕을 방문한 한국인은 31만6000명으로 전년도 28만3000명보다 11.7% 증가했다. 한국인 방문객은 2005년 20만5000명으로 처음 20만명을 돌파했고 이듬해 24만2000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가 시작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계속 줄어들다가 2010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뉴시스 2013-01-03)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고, 세계 무역의 중심지이며, 세계 예술의 중심지이다. 게다가 뉴욕은 잘 차려진 전세계 인종의 비빔밥 밥상이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용광로라면 다 녹아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 제각각이다. 그러다보니 코리아 타운도 있고, 차이나 타운도 있고, 일본인 타운도 있고, 이탈리안 타운도 있다. 그러다 보니 방문자가 일단 많다. 친지를 찾아 온 방문자든, 비즈니스를 위한 방문자든, 일단 관광을 하게 되니 관광객인 것은 맞다.

 

     세계적인 명소도 많다. 진짜 명소라서 명소인지, 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가서 명소가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잘 알려진 것만 추려도 자유의 여신상, 세계 경제/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 세계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 예술의 중심 브로드웨이, 문화의 중심 타임스스퀘어, 세계 5대 박물관에 뽑힐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화에서 흔히 보던 브루클린다리, 초고가 브랜드샵이 즐비한 소호(SOHO) 거리, 북한 외교관도 상주하면서 돈을 쓸 수밖에 없는 UN본부, 호기심을 자극하는 할렘가, 할렘가 부근의 명문 콜롬비아대학교, 9.11 테러의 잔해 WTC사이트, 일단 규모로 기를 죽이는 MOMA 미술관, 유명인들의 밀랍인형 전시로 유명한 마담뚜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부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돈을 긁어 낼 수 있는 명소들이다. 이거 다 누가 만들었을까? 

 

     일단 소호 거리와 그리니치 빌리지 두 곳을 음미해 보자. 초고가 브랜드샵이 즐비한 소호(SOHO) 거리. 흔히 이 지역을 뉴욕 패션의 메카라 부르는데, 본래 소호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의 거리였다. 미국 대공황 이후 황폐해진 소호 거리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아틀리에를 만들기 시작했고 젊은 예술가들의 감각이 갤러리와 부티크를 소호로 불러 모았다. 곧 개성 넘치는 숍이 많이 생겨나 예술의 거리로 거듭나게 된다. 특히 멋스런 벽화를 눈여겨 볼 만하다. 소호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던 예술가들이 외벽이나 간판을 캔버스 삼아 그린 것이 지금까지 남아 세월의 흔적까지 더해져 예술작품으로 멋스럽게 느껴진다. 소호만의 분위기는 늘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해내는데, 패션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미지가 굳어져 이제는 소호의 트렌드가 뉴요커 스타일을 대변하기도 한다. 샤넬, 프라다 등 일류 브랜드까지 들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더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근처 그리니치 거리를 중심으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나 클럽이 모여 있는 지역을 ‘그리니치 빌리지’라 부른다. 그리니치 빌리지라는 명칭은 영국인 이주자들이 런던 근교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네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자유롭고 예술적 기질이 다분한 보헤미안적 분위기를 품고 있다. 20세기 들어 에드거 앨런 포우, 월드 휘트먼 등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분위기를 갖게 됐다. 1940년대에는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그 후 1955년, 뉴욕의 대표 정보지 <빌리지 보이스>가 이곳에서 발행되면서 땅값이 올라 예술가들은 그리니치 빌리지를 떠나게 되었지만 예술적인 분위기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뉴욕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가게들과 편한 차림으로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카페가 있어 여행자들이 한번쯤 꼭 들르는 곳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위 두 명소의 변화/발전 과정은 대한민국 서울, 강남 신사동의 가로수 길의 발전과정과 똑 같다. 그렇다. 바로 창발의 결과다. 누가 간섭하지도 않았고,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고, 시청이나 구청의 개발계획과 무관한 것도 똑 같다. 각자가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서로 되먹임하면서 스스로 발전하여 명소가 되어가는 과정까지 똑 같다.

 

     흔히 미국을 자유의 나라, 기회의 나라라고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모순도 많은 나라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료복지나 분배 같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이지, 다른 모든 것에는 개방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유롭다. (복잡계는 타율을 싫어한다.) 이것이 끝 없는 창발을 불렀고, 그 창발의 결과가 오늘의 뉴욕이다. 뉴욕은 창발의 도시이며 창발의 천국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려 가장 많은 돈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서히 새로운 복잡계가 광범위하게 유발되고 새로운 창발의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감지되는 우리의 미래는 밝다. 앞에서 살폈듯,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민족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