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창발사회론 (7) 사회적 자본, 신뢰|

별관신사 2013. 1. 30. 03:12

- 저低신뢰사회

 

     2013년 1월, 한국투명성기구에서 1020세대 2012명에게 설문한 결과, 한국의 1020세대 중 절반 이상이 ‘부정입학과 부정취업 제안을 받으면' 전체의 54%인 557명이 ‘받아들인다’고 답했다. ‘거절한다’는 46%(474명)였다. 31세 이상(981명)에선 같은 물음에 48.8%(479명)가 ‘받아들인다’, 51.2%(502명)가 ‘거절한다’고 답했다.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불법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도 1020세대가 40.1%(409명)로 31세 이상 31%(300명)보다 높았다. 신뢰에 대한 문제를 두고 젊은층의 배신율이 더 높다는 것은 일견 절망적이다. 

 

     그러나 불과 그 차이가 10% 내외인 3060세대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1020세대의 사회적, 가정적 교육을 현재의 3060세대가 감당해왔다는 점을 보면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저低신뢰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예를 든  '몰래바이트' 류의 불공정 게임은 전형적인 사회적 배신의 극명한 일부다. 국민을 상대로 반드시 지킬 것을 전제로 하는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남발했던 정치권이야 말 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저低신뢰 사회는 유교적 이상을 표방한 조선 500년이었다. 양반과 서얼의 차별, 중인과 상놈의 차별, 양반 사이에서도 힘 있는 양반과 힘 없는 양반은 입신 단계인 과거시험부터 차별화되었다.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온 음서제도는 권력층 자제를 대상으로 제도적인 무시험 특전을 제공했고,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하더라도 조상 중 누군가 역모와 관련되어있으면 그대로 낙방이었다.

 

     이런 조선시대에 이순신장군같은 영웅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나 ‘今臣戰船尙有十二,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전하)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오니, 죽기를 다해 싸운다면 아직 희망이 있사옵니다.’했던 신뢰의 영웅.

 

     당시 세치 혓바닥으로만 전쟁을 치르는 조정의 신료들이 생각하기로는.... 아무리 천하의 이순신이라도 지금 상황으로는 전멸이다. 뭐가 있어야 싸우지. 그래서 위와 같은 지시를 내렸던 것이었다. '세 불리하니, 육지에 올라 싸우라.' - 時朝廷以舟師甚單,不可禦賊,命公陸戰(이 때 조정에서는 수군의 숫자가 너무 적어 적을 막을 수 없을 터, 육지에 올라 싸울 것을 명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만약 쥐뿔도 모르면서 이빨만 까는 조정 신료들이나 천하의 얼치기인 선조의 명령을 듣고 이순신이 육지에서 싸웠더라면? 

     自壬辰至于五六年間,賊不敢直突於兩湖者,以舟師之扼其路也. 임진년 이래로 5-6년간 적이 감히 양호(兩湖 : 충청, 전라)로 직접 돌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舟師]이 그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나이다..... 당시 남아 있었던 열두 척이라도 죽기로 싸워 총청도, 전라도로 가는 길을 막아야 되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거다. 그래서 죽기를 다해 싸우는 것을(出死力拒戰)을 조건으로 바다에서 적을 맞았다. 

 

     당시 충청, 전라가 뚫리면 왜군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충청, 전라의 군량미를 먹으면서 북으로 진군할 수 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당장 식량부터 절단났을 것이다. 국가간 전쟁에서 먹을 것도 없이 싸워서 이기는 경우는 드물다.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대해전(大海戰)을 꼽자면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B.C 48년), 영국 드레이크의 칼레 해전(1588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1592년), 영국 넬슨제독의 트라팔카 해전(1805년)등이다. 일본은 여기에서 아무거나 하나 빼고 러시아 발틱 함대와 붙었던 쓰시마 해전(1905년)을 넣고 있지만. 이 어마무시한 해전들을 지휘한 장수 중에서 다른 셋과 완벽하게 다른 분이 이순신 장군이다. 한산대첩의 승전이나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것도 그러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고, 진짜 중요한 차이점은 보급이었다.

     다른 모든 전쟁에서는 당연히 국가에서 무기와 군수품을 공급해 주었지만 이순신은 전쟁 전부터 전쟁기간 내내 무기와 군량미, 군수품을 거의 대부분 자체 해결했다.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농사에 아주 흡족하다. 점을 쳐보니, 풍년이 들 것 같다." - 난중일기 병신년 5월 17일. 이순신 장군이 점을 쳤다. (당시에는 주역이라고 해서 대부분의 선비들이 간단한 점은 직접 보기도 했다. 유교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4서 5경에 주역이 들어간다.)

     중요한 건 이순신 장군이 점을 쳤다는 사실이 아니고, 농사일에 점을 칠 정도로 군량미 확보에 신경을 쓴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모이지 않고, 백성이 모이지 않으면 군사를 모을 수 없고, 군사가 없으면 전쟁은 아예 시작도 못 한다는 것을 무장武將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알고 있었다. 이러니 백성이 모였고, 백성은 장군을 신뢰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소문은 천리를 날았다.

 

     이순신이 처음 임지에 부임했을 때 우연히 바닷가에 삼목 조각이 떠내려 온 걸 발견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사소한 문제지만 이순신 장군의 예리한 눈은 비켜가지 못 했다.
     ‘이게 무슨 나무 조각이냐?’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잘 쓰지 않는 삼나무 널판 같습니다.’
     ‘대패질이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배를 만들다 버린 조각인 것 같습니다. 아귀 흔적이 있습니다.‘
     ‘자주 보이느냐?’
     ‘근자에 자주 보입니다. 파도가 심한 날은 제법 많이 보입니다.’
     ‘머지않아 왜놈들이 물을 건너오겠구나.’

 

     당시 사회분위기로 볼 때 왠만한 장수가 평시에 전쟁 준비를 한다고 하면 지역사회 자체에서 벽에 부딪혀야 했다. 명령 한 마디로 힘들게 부역을 해야 하니, 괜한 일로 소란을 떠는 것 밖에 안 되는 분위기. 이런 분위기에서 이순신이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사회를 아우르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임란 직전 일본에 다녀 온 김성일과 황윤길의 엇갈린 진술에 머저리 선조가 ‘괜히 전쟁 준비까지 할 건 없다.’고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이순신은 임지에서 민심을 다독여 신뢰의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고, 나무를 베어 거북선과 전선을 만들고, 농업, 어업, 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은 물론 요업, 화약, 토목, 제철, 조선, 방위산업, 정보망 신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자발적으로) 준비를 갖추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나 해적출신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이나, 전쟁터만 헤집고 다닌 넬슨제독이나 이순신 장군에게는 족탈불급이다. 신발 벗고 따라와도 못 따를 '신뢰의 리더십'의 귀재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러시아 발틱 함대를 작살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소리다. 나를 넬슨과는 비교해도 되지만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장군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했다. 

     불신의 사회. 이렇게 리더십이 충중하면 리더십이 떨어지는 등신들의 모함을 받게 된다. 그런 자들이 올라가는 방법은 권력의 힘을 빌리는 것 외에는 없으니까. 자기 리더십이 있어야 그런데 눈 돌리지 않는데, 자기 리더십이 없으니 권력에 기대어 잘 난 사람을 모함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했다.

 

     1597(정유)년 2월 25일 금부도사가 이순신을 잡으러 왔다. 금부도사 옆에는 원균이 서 있고. 인수인계가 시작되었다.

 

     군량미 9914섬, 화약 400근, 총통 300정....(이하 생략) 그러나 이것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만 계산한 것이고, 배에 장착되어 실려 있거나 한산도 밖에 있는 것은 빼고도 이 정도였다. 특히 군량미는 백성들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양식은 빼고 순수하게 군사들이 먹을 것만 따진다. 이런 엄청난 곡식이 어디서 났냐고? 농사지은 거지. 어디서 나. 군대가 전투에 임하지 않을 때 농사를 짓는 것을 ‘둔전책’이라고 하는데 병법에 나온다. 

     임진왜란은 비참한 전쟁이었다. 당시 군대는 (일본이든 중국이든 심지어는 조선 군대도) 약탈이 생계수단이었고 소득원이었다.(고급스럽게 말하자면 전리품) 약탈품은 전쟁이 끝나면 집에 가져 갈 퇴직금이기도 했다. 조선 백성은 무려 7년을 이렇게 당했다.

    이 약탈을 피해 양민들이 유랑을 하게 된다. 약탈할 때는 사람도 죽이니까. 여자는 한 번 더 당하고 죽고. 이 유랑민들이 어디로 가나 고민할 때 바람을 타고 소문이 귀에 닿는다.
     '이순신 장군한테 가면 살 길이 있다더라....’
     이럴 때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에는 언제나 백성들이 바글거렸다.
     ‘OO에서 온 아무개요. 먹고만 살게 해 주십쇼.’
     '무엇을 잘 하느냐?‘
     ‘풍구질이라면 좀 합죠. 원래가 대장간이 천직이라.’
     ‘그렇구나, 우선 뭐 좀 먹고 영내 야장에게 가거라. 식솔들 데리고. 너도 할 일이 있을 거다.’ ....

     '신뢰'라는 무기 하나로 백성을 모아 해안이나 섬의 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짓고, 고기 잡고, 소금 굽고, 질그릇 만들고, 고철 줍고, 풀무질해서 무기 만들고, 나무 베어 전선 만들고.... 이러니 자연히 경제가 살고. 경제가 사니 세금도 걷히고. 세금이 많이 걷히니 군량미 9914섬, 화약 400근, 총통 300정....씩이나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군량미 9914섬이 얼마 정도일까? ‘섬’은 곡식을 세는 단위인데, 열 되는 한말이고, 열 말이 한 섬이니까, 한 섬은 대략 180kg 정도다. 그럼 180kg 곱하기 9914섬이라면 1,783,529kg이고 1785톤 정도니까, 8톤 트럭으로 223대 분량이다. 전쟁 중에 이 정도의 식량을 비축해 놓은 이순신. 이걸 원균이 탈탈 털어 먹어버렸다.

     이순신이 금부도사에게 잡혀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은 넋을 놓았고, 주위의 백성들은 분개하며 제승당으로 몰려들었어.
     ‘이런 개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구나.’
     ‘이대감이 잡혀가면 우리는 죽는다.’
     ‘조정 간신배들이 우리 장군을 모함했다.’

     고함소리가 제승당 담을 넘어오자 금부도사의 불알이 바짝 오그라 붙었다. 관헌들도 마찬가지고.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인데 임금이고 뭐고 그런 게 보여? 입으로만 먹고 사는 놈들 특기가 나올 차례다. 거꾸로 이순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 ‘대감, 살려 줍쇼!’

     이순신은 이몽귀, 권준 등의 수하 장수에게 백성들을 진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제승당 앞에는 더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고 한산만에는 어선들도 새카맣게 모였어. 모두 이순신장군의 신뢰의 리더십만 믿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백성들. 그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늙은이 한 사람이 금부도사 앞에 섰다. 군중의 대표 격으로 나선 것이다.
     ‘왜놈 난리에 우리 조선을 누구의 힘으로 보전했소?’
     ‘우리 통제사 대감이 아니셨던들 오늘날 상감께서 어찌 서울에 돌아오실 수가 있었으며, 조정의 양반네들인들 무사할 수 있었겠소?’
     늙은이의 눈에 핏발이 섰다. 금부도사를 죽일 듯한 눈이었다.

     선조와 대비되는 이순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선조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도망 칠 준비부터 했다. 평양으로 의주로. 의주에 간 이유는 중국 명나라로 망명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명나라가 가만 들어보니 왜병의 진군속도가 너무 빨랐다. 거기에 조선 국왕이 망명을 신청해? 이거 일본군과 조선군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냐? 망명을 핑계로 국경을 열어주면 명나라에 진입하려는 것 아냐? 이렇게 의심을 했다. 불신의 사회와 또 다른 불신의 사회인 조-명 사이의 외교는 최소한의 신뢰조차도 확보하지 못했다. 선조가 울다시피 망명을 신청해도 명나라는 거절했다.

     게다가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 갈 때, 평양을 버리고 도망 갈 때,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백성이고 뭐고, 나라고 뭐고 자기만 살려고 달아나는 임금을 버러지 보듯 했다. 따르는 신하라고 해봐야 백 명도 안 되었다. 그러니 임금이 궁을 빠져나가자마자 백성들의 방화로 조선의 궁궐은 모조리 불에 탔다. 이미 조선의 백성은 임금 선조의 백성이 아니었다. 국왕에 대한 신뢰는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게다가 명군이 와서 가만 보니, 국왕이라는 자가 백성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선조는 신뢰같은 것은 없어도 권력욕은 강했다. ‘쑈쑈쑈’가 따로 없었다. 무려 15번이나 양위(讓位)하겠다고 나섰다. 

 

     국왕이 왕위를 양위하겠다고 나서는데 신하가 ‘거 참 훌륭한 결정이오. 그렇게 하시죠.’하는 신하는 있을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해야 한다. 눈치 없이 ‘그렇게 하시옵소서.’ 했다가는 며칠 내로 모가지가 떨어진다. 조선 조정은 이런 치사한 쑈를 무려 15번씩이나 해야 할 정도로 허약한 신뢰사회였다.

 

     이런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잡아 올린 데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논객이 생각하는 선조의 심리는 이러 하다. - 이순신이 너무 큰다. 백성들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는 임금인 자신보다 수 천 배는 더 크다. 백성이 임금인 자신보다 이순신을 더 믿고 따른다. 불안하다. 저렇게 크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일까?

 

     그는 선조에게 잡혀 가 모진 국문을 당했다. 당시 국문은 생사람 죽이는 고문이었다. 이순신 자신이 선조에게 국문을 당하여 초죽음이 되고도 (반병신이 되어) 12척 남은 병선으로 133척의 적과 붙어야 했다. 

     만약 원균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이겼다면 이순신은 어떤 명분으로든 목이 달아났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균의 리더십은 이순신과 비교가 안 되었다. 이순신이 만들어놓은 전쟁 기반까지 홀랑 다 털어먹고 적의 칼에 맞아 죽어버렸다.

     선조가 아무리 이순신을 꺼려 해도 일단은 자기도 살고 봐야 했었다. 그래서 복직시켰다. 아무 것도 없이. 그야말로 이제는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이순신 그 특유의 '신뢰의 리더십' 하나 밖에 없는 상태. 그해 7월18일 하동 노량에 정박해 있던 판옥선 12척을 점검하고 작성한 장계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패전으로 인한 전의 상실.
     판옥선 정원이 190명인데 한 척에 90명만 남아 있음, 척당 100명 씩이나 부족함.
     군량미가 바닥나 수군 전체가 기아상태. 굶어죽기 직전.
     화약과 대포 절대부족. 전투수행 불가. 

     당시 수군 병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죽으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군량미도 부족했다. 원균이라는 등신이 다 털어 먹고 남은 것은 왜군들이 다 털어 먹었다. 배고픔과 공포가 진중을 휩쓸었고 신뢰는 무너졌다.
     '아무리 천하의 이순신이라도 살아 날 방법 없다. 튀자.'
     탈영병이 생겼다. 탈영병을 도와 준 초급장교도 있었다.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도와주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잡아들여 담담하게 하늘을 보면서 짧게 명했다.
     '목을 쳐라.’ 
     그리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실이 묻어나왔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이긴다. 적은 내 이름만 들어도 떨게 되어 있다. 이들은 어리석었다. 이겨서 차지할 영광보다 당장의 두려움에 져서 마땅히 죽었을 뿐이다.’

     이런 막 가는 판에 이런 말이 통할까? 다 죽어간다던 장수가 고작 13척으로 전쟁을 치러가는 판에 이런 말이 통했을까? 통했다. 기적처럼 통했다. 신뢰의 눈빛. 이순신의 눈빛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지던 진중에 용기가, 힘이, 믿음이, 이상한 전율이 바람처럼 전염되었다.
     '눈빛을 봐라. 저게 이순신 장군이다.’
     ‘나는 믿는다. 우리는 이제 안 죽는다.’
     ‘저 양반이면 이긴다. 나도 믿는다.’
     ‘우리는 이긴다. 이순신이면 이기게 되어 있어.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잖아?’ - 그리고 이겼다.

     빈손으로, 맨주먹으로.... 다시 사람을 모으고, 식량을 구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각종 무기에다 화약까지 자기 손으로 구하고 만들어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13척으로 133척을 박살냈다. 이겼다. 이런 '신뢰의 리더십'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세계 해전 그 어디에도 이런 장수는 없었다. 그가 가진 무기는 자신과 백성에 대한 신뢰... 다른 것은 없었다.

 

     이걸 본 선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저런 일을 해내다니. 이순신은 왕재王材다. 군왕의 재목이다. 이걸 그냥 두었다가는 신뢰의 리더십이 천분의 일도 안 되는 나는 죽는다.... 그러나 권력은 아직 내 손에 있다. 전쟁이 끝나면 처리해야겠다. 유방이 한신을 제거한 것처럼.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각종 문헌을 뒤지다 보면 그런 심증은 많다. 아주 많다.

     이순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선조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당해봤고. 전쟁이 끝나면 나는 죽는구나. 그렇다고 조상 대대로, 지상 최대의 가치로 섬겨온 ‘충(忠)’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전쟁, 노량해전을 자신의 전사처로 만들었다. 그리고 의도했던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1598년(선조31년) 11월 19일 새벽. 차가운 바닷바람. 홀로 갑판 위에 선 이순신. 조용히 무릎 꿇어 두 손 모아 하늘에 빌었다. ‘나를 받고, 이 전쟁을 이기게 하소서.’ 그리고 정통으로 적탄을 맞았다.

     이순신장군은 적의 조총 유탄(흐르는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원거리에서 쏜 조총의 유탄 정도는 당시 장군복인 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다. 설사 갑옷을 뚫었다 해도 심장까지 파고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무방비 상태에서 아주 가까이서 쏜 총알이라면 모를까. 

     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이건 김덕룡 장군의 전기에서 나오는 내용이고. 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 이건 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시의 문구다.

     이순신은 사천 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조끼인 '환삼'도 벗어젖히고,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순신 자살설이다.(노병천).

    신뢰와 불신 - 백성과 장수 사이에서 조성된 신뢰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렸고, 불신은 그 나라를 살린 구국의 영웅을 죽였다.

 

     한 줌 남은 사회적 신뢰까지 임진왜란으로 날려버린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한 번 더 무너졌다. 인조는 청나라 마부태가 쳐들어오자 선조의 예를 따랐다. 튀는 것. 이번에는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없었다. 백성들의 게릴라 전戰도 없었다. 마부태의 진격 속도도 빨랐지만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아무도 나라를 위해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겨우 소수의 의병이 일어났지만 모조리 패했고 나머지는 임금인 인조가 항복한 뒤에 일어 나 효용이 없었다.

  

     강화도를 목표로 도망가는 데, 길이 막혔다.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예를 표하면서 항복했다. 삼배구고두.... 청나라 칸에게 절 한 번 할 때마다 얼어붙은 땅바닥에 대가리를 박는 것이 바로 삼배구고두다. 

     대가리 대충 처박으면 되냐고? 군대 얼차려 하듯이 요령껏 하면 되냐고? 어림없다. 인조가 머리를 적당히 조아리니까 청나라 칸이 소리쳤다.
     “안 들려~!”
     칸이 안 들린다 하니 옆에 시립해 서 있던 청나라 졸개들이 소리쳤다.

     “쎄게 박아!”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칸이 '안 들려'하니까 먼 거리에 앉은 칸의 귀에 들릴 때까지 (얼음 땅 위에) 머리가 터지도록 처박는 것이다. 찧는다고 해야 되나, 빻는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이마에서 피가 튀도록 처박았다. 혹이 나는 정도가 아니고 피가 튀는 정도.... 피가 튀어 얼굴을 적셨다.
     “쾅!”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고.... 뇌진탕 일보 직전이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아홉 번을 이렇게 언 땅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에는 피가 터지고 그 피가 흘러 어깨를 적셨다. 안 죽은 게 다행이었다. 이후 인조가 좀 멍청해 진 것도 이때의 일이 영향을 좀 끼쳤을지도 모른다.

 

     우리 한민족의 왕이 이민족의 왕에게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머리를 박은 것은 인조가 오천년 역사상 최초였다. 이게 인조 시대의 조선이었다. 만약 이 때 국왕과 신하 사에에, 신하와 백성 사이에, 아니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가 가득한 시대였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을까?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은 차치하더라도 민, 관, 군이 하나 되어 당태종 15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 양만춘 장군 시절만 해도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임금이라는 작자가 백성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걱정한다면 사회적으로 신뢰라는 것은 형성되기 힘들고 결국은 나라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른다. 사회적 신뢰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 사회적 자본

 

     다시 한 번 위의 기사를 보자. 한국의 1020세대 중 54%가 ‘부정입학과 부정취업 제안을 받으면' 받아들인다’고 대답하고, 40.1%가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불법을 통해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조선시대로 되돌아 가려는 것인가.

 

     하버드대학의 퍼트남(R. Putnam)교수는 ‘민주주의가 잘 되게 하려면(Making Democracy Work)’이라는 저서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사회가 발전을 이루는 데는 공동체 문화와 신뢰, 협동 같은 ‘사회적 자본’의 형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나타난 수치를 보면 우리는 '사회적 신뢰(Social Trust)'의 위기 국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현상은 저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볼 것이고, 저 집단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 우리가 손해 본다는 생각, 즉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 게임에서 출발하는 사고방식, 여러가지 불신이 악회되면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정한 경쟁의 틀'이 가동하는 것이 가능할까? 공정한 경쟁의 틀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힘들다. 경제학에서의 사회적 '신뢰'는 미국의 정치학자 프렌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가 자신의 저서 "Trust :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 Trust(1996)”에서 강조한 말인데, 그의 사회적 '신뢰'는 공정한 시장경제와 깨끗한 정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상생적 질서를 의미한다.    

 

     후쿠야마 교수는 신뢰Trust를 사회적 자본이라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뢰를 기존의 경제학에 대입하면 아래와 같은 수식이 가능할 것이다.

     * 시장가치 = 재무가치 + 지적가치 + 사회적 가치(신뢰) + 기타

     * 국가자본 = GDP창출자산 + 지적자본 + 사회적자본(신뢰) + 기타  

    

     후쿠야마 교수는 가족주의, 유교주의, 지역주의에 찌든 중국, 대만,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을 저低신뢰사회라고 지적했는데, 20세기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을 왜 저신뢰사회로 분류했을까? 그는 한국 재벌과 일본 재벌의 차이점에서 경영권의 상속을 찾아내었고, 이에서 정경유착과 정부통제, 일방적 관료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학연주의 같은 중국식의 사회구조와 관습을 닮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중국은 법치法治국가가 아니라 대표적인 인치人治국가다.)

 

     그는 독일과 일본을 고高신뢰사회로 분류했는데, '사회적 연대'와 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고신뢰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수평적인 노동계급과 노사관계, 기술과 투자 부문에서의 자율성, 협력업체 간의 공정경쟁 보장, 기술 혁신에 대한 국가 공동체의 긍정적 여론, 가족중심 경영에서 자본과 경영의 분리, 견제와 균형, 감시의 민주적 평등관계 등 전반적으로 관습적이고 관료적이며, 가족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회의 개혁을 통하여 공동체적 연대와 문화가 '공정한 시장경제'와 '깨끗한 정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상생적 질서'를 보장하는 사회를 고신뢰사회라는 것이다.

 

<참고자료>

  민망한 한국 ◆ 기업 신뢰도 '꽝'···에델만 조사서 꼴찌 수모

     세계 26개국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의 기업 신뢰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홍보업체 에델만이 21일(현지시간) 발표한 '2013년 에델만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론 주도층의 기업 신뢰도는 31%로 조사대상 26개국 가운데 최하위다. 이는 조사대상국 평균치(59%)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 여론 주도층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44%로 기업 신뢰도보다 높았다. 그러나 조사대상 26개국 평균(50%)에는 미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기업 신뢰도가 정부 신뢰도보다 13%포인트나 낮아 두 신뢰도 사이의 격차가 가장 컸다.

     한국 여론 주도층은 기업과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물론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정부 관료에 대한 신뢰도도 낮은 수준을 보였다. CEO와 관료에 대한 한국 여론 주도층의 신뢰도는 각각 34%, 22%로 조사대상국 평균(43%·36%)에 못 미쳤다. 조사대상국 가운데 한국처럼 기업 신뢰도가 정부 신뢰도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는 10개다.

     16개국은 기업 신뢰도가 정부 신뢰도를 웃돌았다. 특히 멕시코는 기업 신뢰도가 정부 신뢰도보다 무려 41%포인트나 높았다. 이어 브라질(31%포인트), 아르헨티나(30%포인트), 스페인(24%포인트), 일본(20%포인트) 순이다.

     조사대상국 전체로 볼 때 여론 주도층은 가장 믿을만한 집단으로 학계 전문가들(69%)을 꼽았다. 이어 기술 전문가(67%), 여론 주도층(61%)이 뒤를 이었다. 업종별로는 산업기술 분야(77%)가 가장 높은 신뢰도를 받았다. 금융권(50%)과 언론(53%)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에델만의 이번 조사는 각국 여론 주도층이 자국 정부와 기업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 수준을 지수화한 것이다. 여론 주도층이란 각국에서 가계소득 상위 25%에 속하는 대졸자로 5800명이 조사대상에 포함됐다. (아시아경제 2013.01.23)  

 

     2010년, 우리나라는 세종시 문제로 들끓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공약인 정부 일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 공약을 백지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박근혜 (당시) 의원이 즉각 반발했다.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현직 대통령의 결정에 여당 의원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신뢰를 상징으로 내세운 박근혜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다.

 

     그러자 같은 당 정몽준 대표가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를 들고 나왔다. 옛날 중국 노나라에 미생이라는 청년이 여인(애인)과 만나기로 약속 한 다리 밑에서 여인을 기다리다가 갑작스러운 비로 여인이 오지않자 우직하게 약속을 지키느라 불어난 개울물에 빠져 죽은 고사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자 박근혜 (당시) 의원은 '강물이 불어 나는데도 다리 아래에서 애인을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다 익사한 미생은 진정성이 있는 반면 애인은 진성성이 없는 것.'이라며 결국 미생이 귀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이 '잘 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고 하자, 박근혜 의원은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받아치는 등, 신뢰에 대한 문제에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박근혜의 신뢰가 이명박의 위약을 이겼다. 가까스로 '신뢰'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이 기사회생하는 순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증세를 하지 않으면 박근혜의 공약은 결코 지킬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박선규 대변인은 “박 당선인께서 하신 공약은 대통령 직무하시면서 다 지킬 것”이라며 “박근혜 인수위는 지킬 수 없는 공약들을 걸러내는 것이 중요했던 다른 인수위와는 다르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이에 대한 논란은 가라 앉지 않았다.

 

     (공약을) 모두 다 지켜야 하나, 안 지켜도 되나....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조사해 보니 48%의 국민이 '다 지킬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국민의 48%가 면죄부를 준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반드시 다 지킨다.'며 다시 한 번 약속 실천 의지를 재확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월 7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국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은 사회적인 자본을 쌓는 것이고, 사회적 자본은 결국 신뢰”라고 말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뢰의 표상이다.

 

 <참고자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증세를 하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모두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증세 없이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을 모두 실현하기 힘들다는 비판에 대한 반응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경제브레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안종범 고용·복지 분과 위원은 18일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에 마련된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증세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증세는 없다"고 답했다.
     안 위원은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석좌교수의 '신뢰'라는 책을 보면 산업발전시대에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지 나온다"고 발언, 증세 없이 신용불량자 채무 50~70% 탕감, 암·심장병·중풍·난치병 등 치료비 국가 100% 부담, 사병월급 2배 인상, 65세 이상 노인 기초노령연금 20만원 지급 등의 공약을 실행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부처 업무보고 등을 통해) 공약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현실화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 받았다"며 "그런데 추측성 보도가 나오면서 국민들이 '문제가 있다'는 선입견을 가졌는데, 계속적으로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 위원은 박 당선인의 복지공약 이행과 관련,"공약을 짤 때 다 실행할 수 있는 것들로 한 것"이라며 "5년 간 다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는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 재원이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결혼하면서 '집은 내가 살게'라고 해도 그것이 (서울)강남의 10억원 짜리일 수도, 지방의 5000만원 짜리 일 수도 있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4대 중증질환 보장과 관련, "의료 쪽에 물어보면 의사들도 필수라고 하는 부분이 있고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며 "건강보험공단이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기준이 있는 것으로 안다. 플러스 알파는 한도 끝도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안 위원은 지방 공약 재원과 관련, "지방 공약의 경우 국고사업으로 갈 수도 있고 매칭사업으로 갈 수도 있어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 과정이 필요하다"며 "대선 전 지방 공약을 짜는 과정에서 이미 지자체, 지방의회 등과 협의해 잘 짜놨다"고 설명했다.(뉴시스 2013.01.18)

 

     물론 작금의 신뢰 상실에 대한 제 1의 책임은 지난 시절의 정치권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그 책임의 당사자는 아니다. 오히려 박근혜는 지난 정치 역정 내내 신뢰를 상징으로 내세우면서 약속을 지켰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을 모두 지키고 신뢰를 해치는 여러 난제들을 해결한다면 사회적 자본인 신뢰지수는 경이로울 정도로 높아지고 정치, 사회적 문화도 바뀌겠지만, 대통령 홀로 고도의 신뢰사회를 만들기에는 힘 겹다. 

 

     IMF 이후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짧아져 1년 미만 근속자 비율이 OECD 25개국 중 1등이고, 경제 규모에 비해 사업체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한국경제의 또 다른 특질이다. 2009년 실질국민소득 100만 달러당 중소기업 수는 한국이 2.64개인데 일본은 1.11개, 미국은 0.45개다. 사업체 형태가 모조리 주식회사인 것도 한국만의 특질이다. 이 같은 특질의 근저에는 ‘저(低)신뢰’라는 문화적 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한 이래 이를 입증하는 국제비교가 몇 차례 행해졌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 신뢰지수는 멕시코보다는 높으나 OECD 평균을 밑돌고 있다. 그 대신 갈등지수는 OECD 4위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인 것은 한국인의 가치관이 물질주의적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이 깊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공동체로 조직되지 않은, 분산적 개인으로 구성된 저신뢰의 물질주의 사회였다. 5천년 내내 전쟁과 기아에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에 희망을 걸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경영이 대부분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장, 임원, 사장이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사업주 역시 이를 당연시해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 중소기업끼리 공동으로 협심해서 시장을 개척한다거나 하는 활동도 결여돼 있다. 지난 20∼30년간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이런 저신뢰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이, 기업이, 협동조합이, 종교단체가 이 세상을 인간이 살 만한 생활공동체로 가꾸는 일에 발 벗고 나설 필요가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칼럼에서 일부 인용)     

 

     앞에서 예를 든 2012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솔로대첩을 보자. 만약 여성 예비참가자들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높았더라면 2012년의 솔로대첩은 대박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조차 필요한 신뢰를 높여주지 못했다. 우리의 저신뢰사회가 엄청난 창발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신뢰는 우리 사회의 발전적 창발을 위해서도 중요한 요소다.

 

 

<8편에 계속>

  

2012.01.29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