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일행은 우트가르드 행을 감행했다. 성벽이 너무나 높아서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들은 기나긴 장저으이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기뻤다.
크면 클수록 요란하게 무너지지.
토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도끼를 어루만졌다. 그는 도끼 묠니르를 들고 철제 대문을 깨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스크리미르에게 당한 모욕이 십년 묵은 체증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완력보다는 머리를 서야지.
로키가 그렇게 말하면서 대문을 가로지른 빗장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몸이 여윈 남매도
어렵지 않게 로키를 따라했다. 토르는 자존심 때문에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간신
히 빗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토르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열려 있
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스크리미르가 말한 대로 거대한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면서 토르 일행
을 흘겨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 어려 있었다. 집 끝에는 거인 하나가 위엄을
부리며 앉아 있었다. 토르는 바로 그가 우트가르드-로키, 그러니까 거인 제국의 제왕이라고
판단했다.
반갑소.
토르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알고 있소!
우트가르드-로키가 토르의 말을 가로챘다.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고 말하려던 참이죠? 오다가 재미없는 일도 만났을 테고. 그리고
당신 이름이 바로 오만방자하기로 소문난 토르라는 것도 밝히려 했겠지.
토르는 턱을 치켜들었지만 거인들 사이에 둘러쌍니 터라 함부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제야 우트가르드-로키는 토르를 바로 보았다.
흠, 당신은 보기보다 강할 것 같군. 당신이 잘하는 게 뭐가 있지? 그리고 당신 친구들은
또 뭘 할 줄 알고? 뭐라도 하나 확실하게 하는 자가 아니면 이곳에 머물 수가 없는데.
토르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자 뒤로 물러나 있던 로키가 나섰다.
말씀하시는 게 어쩐지 듣기 거북하군요. 하지만 원한다면 하나 보여드리죠. 음식을 빨리
먹는 걸로 말하자면 이 안에서 날 당할자가 없을 겝니다.
우트가라드의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한 재주게군. 어디 한번 시험해 보세.
우트가르드-로키는 둘러서 있던 거인들 가운데 로기란 자를 불러내 로키와 맞대결 시켰다.
나무쟁반에 내온 음식을 로키는 어지간히 빨리 해치웠지만 어찌 된 일인지 로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로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나무쟁반마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로키가 두 손들고 항복하자 이번에는 지상에서 발빠르기로 당할 자가 없다는 티알피가 나
섰다. 그의 주력은 이미 드넓은 숲 속에서 정찰병 노릇을 할 때 입증된 것이었다. 우트가르
드-로키는 그의 상대로 후기란 거인을 내세웠다. 모두 세 번을 겨룬 경주에서 첫판은 무승
부였다. 그러나 점점 체력이 떨어진 티알피는 둘째 판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를 당하더니
셋째 판에서는 어림없이 뒤쳐지고 말았다.
이제 토르의 차례가 왔다. 본래 영웅은 두주불사인 법. 분래 말술인데다 지금 잔뜩 목말라
있는 토르로서는 어느 누가 술마시기 내기를 걸어 와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우트가르드-로키가 건넨 술잔을 들고 젖먹던 힘까지 다 내어 들이켜도 술은 줄어
들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토르라고 해도 술마시기 내기를 하다 배 터져
죽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고개를 젖혀가며 세 번씩이나 들이켰는데도 술잔의 무게가 줄어
들지 않는 걸 보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윌 우트가르드에는 두 번 들이켜서 그 술잔을 비우지 못할 팔불출은 없지.
거인 왕은 그렇게 토르에게 빈정거렸다. 아무리 자존심을 구겼다고 해도 천하의 토르가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노호했다.
좋아, 힘으로 해보자구. 아스가르다가 자랑하는 천하장사 토르님한테 힘으로 맞설 놈이
있으면 나와! 빈정거리지만 말고!
정 그렇다면 우트가르드가 자랑하는 노파 엘리하고 한판 붙으시지. 비록 할망구긴 해도
토르 자네보다 힘 세보이는 자를 거꾸러뜨렸으니까.
쭈글쭈글한 노파가 나타났다. 토르는 너무나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할머니와 힘겨
루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짜고
짜 노파 엘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토르가 아무리 힘을 주어
도 노파는 억세게 버티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는 노파가 토르를 꿇어앉히고 말았다.
거인들은 참담한 심정에 빠진 토르 일행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푹신푹신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패배한 토르 일행은 일찌감치 일어나 우트갈드를 떠났
다. 토르는 거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야심과는 달리 묵사발이 나고 떠나는지라
잔득 기가 죽어 있었다. 로키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오직 티알피 남매만이 내색은 하지 않았
지만 다치지 않고 그리던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우트가르드의 로키는 성문 밖까지 일행을 배웅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토르의 소매를 잡
아끌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던가? 우트가르드의 거인들은 자네가 예상했던 대로인가, 아닌가?
토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인 왕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몰랐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리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어. 게다가 이제부터
당신들이 나를 비웃고 다닐 생각을 하면 어다 가서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낭패감에 젖은 토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거인 왕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자네가 그렇게 힘센 줄 알았으면 자네를 결코 성문 안에 들여 놓지 않았을 걸세. 자네
가 우리 거인들을 거의 끝장낼 번했다는 걸 알고 있나?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토르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우트가르드-로키
를 올려다보았다. 거인 왕은 귀 밝은 로키를 곁눈질하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는 내 주문에 걸렸던 걸세. 자네가 숲에서 만나 거인 스크리미르는 다름아닌
바로 나였다네. 그때 자네가 도끼로 날 세 번 내리치지 않았나? 첫 번째 내리친 게 가장 약
한 거였지만 만약 그게 날 진짜로 건드리기만 했더라면 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걸
세. 내 요술 때문에 자네는 가상의 존재를 내리치면서 그걸 나라고 생각했던 거지.
우트가르드-로키의 설명을 듣는 토르의 심정은 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회복된
것 같아 기분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았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자네 일행이 우리 성안에 들어왔을 때도 나는 역시 주문을 걸었네. 나랑 같은 이
름을 가진 로키란 친구, 거인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정말 엄청나게 먹더구만. 하지만 그가
상대한 로기란 거인은 사실 들불을 둔갑시켜 놓은 것뿐이라네. 들불의 화신 이지. 그러니 들
판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이 고기뿐만 아니라 나무접시까지 홀랑 삼켬버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또 티알피가 달리기 내기를 한 거인 후기는 사실 내 생각에다 거인의 모습을 입힌
것뿐이야. 티알피가 제아무리 날쌘돌이라고 해도 내 생각보다 빨리 달리 수야 없지 않겠나?
거인 왕은 짓궂은 표정으로 토르를 향해 히죽 웃어보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역시 내 주문에 속았네. 자네가 그 술잔을 들이키는 걸 보고 정말이지 나는 기절
할 뻔했네. 자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술잔의 밑바닥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지. 그런
데 자네가 정말 기절초풍할 음주 실력을 발휘하는 바람에세상의 바닷물이 적잖이 줄어들었
지 뭐가?
이 말을 듣는 토르야말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상대한 노파 말인데, 그 할망구는 늙은 나이의 화신이었네. 전쟁이며 병
따위를 다 이겨낸 천하장사도 늙어가는 나이 앞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 법 아닌가? 그런
데 그 노파한테 자네가 그렇게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놀랍네.
토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런 토르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트가르드-로키는 마
지막으로 말했다.
제발 다시는우리를 찾지 말게. 자네가 또 오면 나는 위 거인국을 지키기 위해서 또다시
마술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네.
토르는 참고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도끼 묠니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거
인 왕은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는 우트가르드 성벽을 향해 돌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성벽 역시 감쪽같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바람 부는 벌판만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하룻밤의 꿈처럼 토르를 농락하고 사라졌다. 토르 일행은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거인을 상
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헛되이 힘만 쓰다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은 것은 오직 염소 한
마리가 다리를 절게 됐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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