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딘은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자
신이 오늘다라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아들 녀석인 토르가 신이 나서 모험을 벌이고 다
니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마구 좀이 쑤시기도 했다.
마침내 오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애마 슬레입니르 위에 올라탔다. 세상에서 둘째가라
면 서러워할 준마 슬레입니르 역시 천상의 뜰에서 풀이나 듣고 있는 자기 신세가 한심하던
터이므로 히힝거리며 신나게 들판을 박차고 나갔다.
오딘은 모험의 상대를 고르는 데에서도 토르보다는 한수 위였다. 이미 거인들의 세계를
휜히 꿰뚫고 있는 오딘은 토르처럼 거인의 요술 따위에 걸려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거인 가운데 가장 힘이 세다는 흐룽그니르의 집으로 직행했다.
당신 누구야?
흐루그니르가 퉁명스럽게 물어왔지만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오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인은 코를 문지르며 오딘과 그의 애마를 쓱 훑어보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표
정이었다.
당신 오는 걸 보고 있었어. 말 하나는 잘 빠졌네.
흐룽그니르가 다시 말을 걸자, 오딘이 거만한 어조로 맞받았다.
요툰헤임의 어떤 말도 이 말한테는 상대가 안 되지. 장담할 수 있네.
거인이 같쟎다는 표정으로 오딘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꼬마 친구?
오딘은 턱을 곧추세워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틀린 말 했을까?
거인이 코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이봐, 자넨 황금갈기 이야기도 못 들었나?
뭐? 황금으로 뭘 갈겨?
오딘이 의뭉을 떨었다.
정신 나간 놈! 황금갈기는 이 어르신이 타고 다니는 천하의 명마란 말이다. 네 녀석의 말
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우리 황금갈기를 따라잡지는 못할 걸! 차라리 황천길을 서두
르는 게 나을게다.
거인의 흥분하자 오딘은 기다렸다는 듯이ㅣ 고비를 잡아채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겨루어볼 텐가? 내 말이 이긴다는 데 내 목을 걸겠네.
거인이 이놈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황금빛 갈기가 치렁치렁한 자기 말에 올라탔다. 그러
는 사이에 오딘의 말 슬레입니르는 뽀얀 먼지를 날리면서 멀리 보이는 구릉 위를 달렸다.
황금갈기와 슬레입니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무려 열아홉 구비를 넘었다.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거인 흐룽그니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들은 거인나라를 떠나 신들의 세
상인 아스가르드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거인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오딘, 이놈! 네가 비열한 속임수를 써서 나를 꼬여들었구나. 도대체 날 어쩔 셈이냐?
거인이 이를 갈며 윽박지르자 오딘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달랬다.
그게 아닐세. 자넬 어쩌려는 게 아니고, 내가 궁전에만 쳐박혀 있자니 하도 좀이l 쑤셔
한번 달려본 것뿐일세. 자, 운동 한번 신나게 잘했으니 이제 우리 발할라궁에서 시원하게 한
잔 하세나.
지상의 전투에서 죽은 전사의 영혼들이 모여 있는 발할라궁은 왁자지껄했다. 오딘과 거인
이 숨도 쉬지 않고 두 잔을 연거푸 비우자 주변에 앉아 있던 전사들은 적잖이 놀라는 기색
이었다. 오딘은 눈썹을 꿈틀했다. 토르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마시기는 벅찼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가 그렇게 많은 술을 한입에 털어넣은 거인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눈자위가 반쯤 풀린 채 꼬부라진 혀로 이렇게 떠벌리는 것이었다.
야야, 조용히들 못해! 발할라궁을 쑥 뽑아서 거인나라에 갔다 박든지 해야지, 이거 원 시
끄러워서...
술을 마시던 전사들이 그 얘기를 듣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오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아뿔싸를외쳤다. 거인은 웃고 있는 천사들을 향해 몸을 홱 돌렸으나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내 이누므 아슈가르드를 박솰낼 테다.
그러자 오딘이 말대접해 주었다.
저런! 아이고, 무서워라.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너희들...너휘들은 이제 죽었어. 너,너,너! 죄다 요절을 내버리겠다 이 말씀야.
거인이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치면서 덧붙였다.
요기 요 두 년만 빼고.
거인 흐룽그니르가 가리킨 것은 미의 여신 프레야와 토르의 아름다운 부인 시프였다. 오
딘이 그녀들에게 눈을 꿈쩍해 보였다. 그러자 두 미인은 흐룽그니르 옆으로 다가가 술시중
을 들었다. 그 바람에 거인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지만 오딘과 여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주사가 심해질 뿐이었다. 오딘은 자기 뒤통
수를 탁탁 치면서 자책했다.
실수였어. 아무리 심심했어도 저런 놈을 여기까지는 끌어들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방법은 토르를 불러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발할라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토르는 부리타케 달려왔다. 그는 도끼 묠니
르를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거인 흐룽그니르를 두 동강 낼 드싱 달려들었다. 그러나 거인은
술독에 빠졌으면서도 꾀는 말짱했다.
이봐요, 토르 양반. 지금 아무 무기도 없이 평화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날 죽이겠다고?
참 좋은 소문 나겠쉐다. 천하장사라더니 째째하게 맨손의 상대를 도끼로 내리쳤다고 말요,
힘자랑을 하려면 정정당당하게 하슈.
토르는 멈칫했다. 듣고 보니 말인즉슨 옳았다.
그렇다면 정정당당하게 한판 붙자!
거 좋쉐다. 지금은 아무 무기도 없으니, 나중에 우리 중립 지대에서 만납시다. 거 왜 돌
로 울타리를 두른 집 있지 않소?
그렇게 해서 가장 힘센 신과 가장 힘센 거인 간에 세기적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거인국의 우트가르드 성으로 돌아온 흐룽그니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거인들 사이에
는 환호와 우려가 교차했다. 흐룽그니르가 발할라궁에서 신들의 혼쭐을 빼놓은 건 자랑스러
운 일이었으나, 거인들 가운데 최강인 흐룽그니르가 무지막지한 토르와 결투를 벌이게 됐다
는 사실은 여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흐룽그니르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거인들이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우트가르드의 로키가 요술을 부려 스크리미르라는 가상의 거인을 만든다 해도
토르가 다시 속아줄 리는 없었다. 생각다 못한 거인들은 약속 장소인 돌 울타리 집 부근에
다 무시무시한 인조 거인을 만들어 토르의 기를 죽여 보자는 꾀를 내었다. 그 곳에는 진흙
위를 흐르는 강물이 있었는데 이 강바닥을 파올려 거대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드릉ㄹ 내려다보는 거인들이 힘을 모아 진흙을 쌓았으니 그 규모는 엄청
날 수밖에 없었다. 키가 무려 40킬로미터, 에베레스트 산보다 다섯 배나 큰 인조 괴물이 우
뚝 섰다.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생명이 없으니 움직이질 못하잖아. 그래도 조금은 꿈틀거려야 토
르가 속을 것 아닌가?
한 거인이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암말 한 마리를 잡아 펄펄 뛰는 염
통을 인조 거인 속에 이식했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고작 암말의 심장을 가졌으니 그야말로
새가슴에 불과했지만 인조 거인의 생명을 얻었다.
이윽고 결투의 날이 밝자 거인 흐룽그니르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손에는 거대한 방패,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허수아비 거인 곁에 나란히 서서 토르 기다렸다. 토르가 제아무리 타
고난 싸움군이라지만 허수아비 거인을 보면 기절초룽해서 전의를 상실하리란 기대를 안고.
바로 그 시간, 토르도 대지에 천둥과 우박을 뿌리며 시종인 날 쌘돌이 티알피와 함께 여
소 전차를 타고 아스가르드를 떠났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웠던지 대지 미드가르드에 사
는 인간들은 세계 최후의 날이왔다는 생각에 벌벌 떨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티알피는 지난번 토르의 거인국 원정 OE 토르가 묵었던 농가의 아들이다.
토르의 염소 다리를 부러뜨린 죄로 토르와 함께 거인국으로 가게 된 티알피는 빠른 걸음 때
문에 전초병 노릇을 했었는데, 그 후 아예 토르의 시종으로 눌러앉은 것이다.
티알피는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전차를 끄는 염소들보다 앞서 거인과의 약
속 장소로 달려가싿. 그의 시야에 방패를 든 거인과 그 옆에 우뚝 선 허수아비 거인이 들어
오자 티알피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흐룽그니르 님! 방패를 내려 발 밑을 막아요! 토르가 땅 밑에서 당신을 노리고 이썽요!
티알피의 목소리가 워낙 화급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거인은 그를 자기 편으로 믿었다.
rmfojt 거인은 부랴부랴 방패를 땅에다 깔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술잔을
굳게 잡았다. 티알피의 뒤를 따라 득달같이 달려오던 토르가 이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그
는 도끼 묠니르를 치켜들고 거인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힘껏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
는 도끼의 시퍼런 날을 보고서야 거인은 들고 있던 술잔을 요격용으로 던졌다. 도끼와 술잔
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순잔은 산산조각이나서 온 세상으로 흩뿌려졌다. 아스가르
드에도 떨어지고 대지에도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져 내린 파편 하나하나는 어마어마한 규모
의 돌산이 되었다. 그 술잔의 재료가 본래 숫돌이었기 때문이다.
숫돌의 파편은 토르의 이마에도 날아가 박혔다. 토르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당 위에
곤두박질쳤다. 한편, 술잔과 부딪친 도끼는 조금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더니
거이느이 정수리를 부수었다. 고구라지는 거인의 한쪽 다리가 토르의 목을 내리 눌렀다.
티알피는 허수아비 거인을 맡았다. 그는 거인 흐룽그니르를 잡고 나동그라진 토르의 도끼
를 집어들어 이 인조 거인의 정강이를 힘껏 내리찍었다. 여차하면 인조 거인의 어마어마한
발에 깔려 죽을 수도 있으리라 각오했다, 예상과는 달리 인조 거인에게는 저항할 히이 없는
것 같았다. 비명을 올리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허수아비 거이을 보고 사정을 짐
작한 티알피는 마음놓고 도끼를 휘둘렀다. 결국 거인들의 눈물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4만
미터 높이의 인조 거인은 대지에 크게 눕고 말았고, 거인 나라에 웅크리고 있던 거인들은눈
물을 흘렸다.
내 목, 내 목 좀 꺼내줘!
토르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거인 흐룽그니르의 다리에 누려 거의 질식할 지경
이었다. 그러나 티알피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인의 다리를 치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티
알피는 빠른 발을 이용해 아스가르드까지 되돌아서 신들을 불러모았다. 토르가 승리했다는
쇡에 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토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신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심지어는 오딘까지 합세했는데도 죽은 거인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달려온 토르의 세 살배기 아들 마그니가 아니었다면 신들과 거인들은 합동 장례식
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토르가 시프를 두고 거인족의 여인과 몸을 섞어 낳은 자식 마
그니는 그 어린 나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못지 않은 괴력을 발휘하여 거인의 다리를 가볍
게 들어냈다. 토르가 쇠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마그니가 뭐라고 하는지
를 들어보라.
토르아 거인족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제가 아닌가요?
토르는 씩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자랑스런 아들아! 아비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죽은 거인의 애마 황금갈기를 네게 주겠노라.
그러자 오딘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나섰다.
안 된다! 거인의 피를 가진 아이한테 그런 보물을 주다니! 황금갈기는 이 아비에게 다오.
그러나 토르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원흉인 아버지 오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토
르와 마그니는 어깨를 겯고 신들의 환호에 둘러싸인채 아스가르드를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
다. 뒤에 홀로 남은 신들의 왕 오딘만이 허리춤에 두 주먹을 얹은 채 혼잣말로 무어라 투
덜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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