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6월 18일 톨스토이의 맏아들 세루게이가 태어났다.
그는 이때 두 가지의 희곡을 썼다.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중 한가지는 [허무주의자]였다.
이 희곡은 톨스토이의 집에서 시험적으로 공연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환영을 받았다.
또 하나는 [독(毒)이 서린 가정]인데 톨스토이는 이것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계획을 세웠으나 연극 철이 끝날 때였으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톨스토이는 그후 이렇다 할만한 자신이 없어진 까닭에서인지 이 희곡의
출판을 단념하였다.
이때부터 톨스토이의 가정은 약간의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들
세루게이는 몹시 아팠고 소냐는 두번째 임신 중이었다.
그해 여름 톨스토이는 먼 곳으로 사냥을 갔다가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가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이 그대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언제든지 그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쓸데없는 망상 끝에 나를 오해하도록 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
인생사회에서 여러 가지 풍파가 있다는 것을 보고 느낀 그는 새삼스러이
인생이 덧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비관만은 하고 있지 않았다. 이때 그는[전쟁과 평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는 데에 5년간의 시간을 바쳤다. 그의
끊임없는 노고와 전념이 [전쟁과 평화]를 낳게 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과 평화]를 쓰면서 그의 모든 힘을 정열적으로 쏟았다. 그 작품에
관계가 없는 것은 처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시인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부분을 잡아내어 그 작품에 쏟아
넣기 때문이며 시인의 작품이 아름답고 그 인생이 추악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그때의 회고록, 기록, 편지, 러시아 및 프랑스의
문헌과 그 외의 서적, 그리고 모스크바의 국립 박물관의 고전을 모두
파헤쳤다. 또한 그 당시의 신분도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1812년의
신문을 보려고 매입광고를 내기까지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선조로부터의 구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쟁과 평화]출판 후에 조그마한 칼럼에서 비록 작가가
자기에게는 상상적인 인물을 자유로 묘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해도 역사상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는 어떤 공상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는 소설에 나오는 역사상의 인물이 행동하며 말하는 장면들은 모두
자료에 근거를 두고 일체의 창작을 가하지 않았다. 이 자료는 일이
진행됨에 따라 수를 더하고 최후에는 하나의 도서관이 될 정도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 그 서적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무용지사라고 생각되나 나는
언제든지 내가 사용한 원문(原文)을 인용할 용의가 있다.」
그는 이때 두 가지의 희곡을 썼다.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중 한가지는 [허무주의자]였다.
이 희곡은 톨스토이의 집에서 시험적으로 공연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환영을 받았다.
또 하나는 [독(毒)이 서린 가정]인데 톨스토이는 이것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계획을 세웠으나 연극 철이 끝날 때였으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톨스토이는 그후 이렇다 할만한 자신이 없어진 까닭에서인지 이 희곡의
출판을 단념하였다.
이때부터 톨스토이의 가정은 약간의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들
세루게이는 몹시 아팠고 소냐는 두번째 임신 중이었다.
그해 여름 톨스토이는 먼 곳으로 사냥을 갔다가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가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이 그대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언제든지 그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쓸데없는 망상 끝에 나를 오해하도록 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
인생사회에서 여러 가지 풍파가 있다는 것을 보고 느낀 그는 새삼스러이
인생이 덧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비관만은 하고 있지 않았다. 이때 그는[전쟁과 평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쓰는 데에 5년간의 시간을 바쳤다. 그의
끊임없는 노고와 전념이 [전쟁과 평화]를 낳게 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과 평화]를 쓰면서 그의 모든 힘을 정열적으로 쏟았다. 그 작품에
관계가 없는 것은 처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시인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부분을 잡아내어 그 작품에 쏟아
넣기 때문이며 시인의 작품이 아름답고 그 인생이 추악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그때의 회고록, 기록, 편지, 러시아 및 프랑스의
문헌과 그 외의 서적, 그리고 모스크바의 국립 박물관의 고전을 모두
파헤쳤다. 또한 그 당시의 신분도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1812년의
신문을 보려고 매입광고를 내기까지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선조로부터의 구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쟁과 평화]출판 후에 조그마한 칼럼에서 비록 작가가
자기에게는 상상적인 인물을 자유로 묘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해도 역사상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는 어떤 공상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는 소설에 나오는 역사상의 인물이 행동하며 말하는 장면들은 모두
자료에 근거를 두고 일체의 창작을 가하지 않았다. 이 자료는 일이
진행됨에 따라 수를 더하고 최후에는 하나의 도서관이 될 정도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 그 서적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무용지사라고 생각되나 나는
언제든지 내가 사용한 원문(原文)을 인용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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