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생애에 대하여

별관신사 2014. 4. 8. 12:01

그의 이번 여행 목적은 형의 문병 외에 교육 사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쌓고 외국에서는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누이 동생은 니콜라이가 있는 소덴으로

떠나고 그는 베를린에 머물렀다.
며칠 동안 베를린에 머물면서 대학을 방문하고 사학(史學)교수인
도우로이젠의 강의와 듀브아 레이몬의 물리학(物理學) 생리학(生理學)의

강의에도 출석하였다. 직공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간 학교에도 가
보았으며 유명한 교수의 공개 강연과 질의함(質疑函)에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규모가 큰 모아비스 형무소를 돌아보면서 독방 이라는

새로운 고문(顧問)의 제도가 되어 있다는 데에서 그는 몹시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라이프찌히에서는 시내를 구경하고 곧 바로 드레스덴으로 가서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하던 작가 패톨드 아우엘바하를 만났다.
당시 톨스토이의 교육 사업은 아우엘바하의 영향도 많이 받았었다.
「내가 소작인들을 위해 학교를 일으키고 국민 학교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이 작가의 감화에 힘입은 바가 많습니다. 두번째 유럽에 갔을 때
나는 내 이름을 나타내지 않고 아우엘바하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다만 나를 예브게니이 바우만 아우엘바하가 쓴 소설 주인공이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우엘바하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자 그것은 진짜 제 이름이
아닙니다. 내 성격으로 봐서 라고 말하고 내 이름을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그에게서 어떤 생각을 자아냈으며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우엘바하는 그때의 톨스토이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예브게니이 바우만이라고 말하였을

때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놀란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사람은 나의 소설을 읽고 틀림없이 나로부터 비방을 받아 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곳에서 톨스토이는 삭소니의 국민 학교를 방문한 뒤 키싱겐으로 갔다.
키싱겐에서는 유치원을 창설하고 교육 사업에 공로가 많은 프리드리히
프레벨의 조카 유리이 프레벨과 친하게 되었다. 프레벨은 톨스토이의

생각이 자기의 조직에서 거리가 매우 멀다는 점에서 놀랐으나 그의 관찰이
날카로움에는 감탄하였다.
톨스토이는 이밖에 여러 곳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러시아의 진보는 국민 교육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국민 교육은 독일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국민은 저항 의식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구민은 벌써 수년간에 걸쳐 올바르지 않은 교육을 받아온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는 또한 국민 교육은 강제적이어서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교육이 행복한 일이라면 그 요구는 마치 식욕이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일으켜지는 것과 같이 쉽게 용솟음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프레벨을 감동시켰다.
그는 이때 베이컨의 [지식의 진보]와 여러 가지 교육에 관계되는 학술
서적 및 단데의 [신곡]에 심취해 있었다.

톨스토이는 그곳에서 유명한 문인 학자들과 잦은 접촉으로 니콜라이형의
문병에 소홀하고 있었다.
니콜라이의 간호를 맡고 있던 형 세루게이가 러시아로 돌아가고

계속되는 치료에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피엘에서 요양치료를 하기로
하였다. 세루게이의 뒤를 이어 톨스토이가 간호를 맡았으나 니콜라이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니콜라이가 죽은 다음 얼마 동안 비관과 절망 속에서
지냈으나 언제까지 그렇게만 지내지는 않았다.
그는 피엘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 주변을 여행하며 문학

작품을 쓰고 있었다. [코삭크]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국민 교육론]을
완성하였다. 그는 한때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나 문학 활동만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교육에 대한 관심도 그전보다 더 깊어졌다.

그는 12월 마르세이유와 쥬네에브를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의
곳곳을 여행하며 농민들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교육 기관과 신학교를
자세히 살폈다.

1861년 1월 그는 파리로 갔다. 그는 프랑스 문학 중 듀마와 콕크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파리에서 투르게네프를 만난 다음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 매일 깰센을 만났는데 깰센은 그때의 톨스토이를 이렇게 말했다.
「두드러지게 세밀하면서도 깊이 간직한 감정의 선이 날카롭게 그리고
대담하게 움직이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놀랐으나 그 반면에 철학적인

견해에 있어선 때로 논증(論證)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미숙한 점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심중에 어떤 포부가 있었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깰센은 더 가까워졌고 두터운 정을
나누었다.
톨스토이가 떠날 때 깰센은 부르돈 앞으로 소개장까지 정성껏 써주었다.

톨스토이는 런던에서 베를린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깰센으로부터 받은 소개장으로 부뤼셀에 들려 부르돈을 방문하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부르돈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소설 [포리크시카]를 쓰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이 말을 만나고 프레벨의 수제자였던 민나 셀고룬여사가
원장으로 있던 유치원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그 유치원은 독일 내에서

가장 뛰어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는 독일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여행에 대한 욕심을 아주머니에게 적어
보냈다.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저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유럽에 나왔으므로 될 수만 있다면 이번 여행을
최대한도로 이용할 생각입니다. .....저는 이번 여행으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저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0여일 동안 드레스덴에서 머물고
부활제에는 틀림없이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가겠습니다.」

그후 베를린에서 교육가인 뒤스델웨프의 아들을 만났으나 그는 그
교육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의 긴 여행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자기가 지녔던

계획이나 방식에는 별로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861년 4월 23일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도착하여 그곳의 일에 착수하기
전에 본국으로 돌아와 있던 투르게네프를 만나 그의 외국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팻트가 경영하는 농장에도 방문하여
팻트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팻트 부인이 자기의 딸에 대한 교육
이야기를 꺼내자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여 둘은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둘은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내세웠다.
마침내 투루게네프는 뛰쳐나가버렸고 톨스토이는 결투장까지 보냈다.

다행히 투르게네프의 결투 반대로 결투는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계속
냉담한 생태를 지속시켰다.
톨스토이가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1861년 농노(農奴)의 해방이 있었다.

그는 농노의 해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노 해방이 있기 3,4년 전에 나는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작 법령(小作法令)의 실시와 더불어 농민들에게 그

사람들의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한 사람의 농노에게 3 데스야지밖에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실행한 단 한가지의 일이 농노들로 하여금 토지를 번갈아 짓도록 강제적인

처리를 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득을 보도록 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톨스토이는 그 후로는 계속 소작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이러한
톨스토이에게 지주들은 불평을 늘어놓았으나 소작인들을 위해 그는

농사시담국직원으로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톨스토이가 두번째의 외국여행을 한 목적의 하나는 교육에 관계되는
모든 사업을 철저히 시찰하고 연구하는데 있었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교육기관에 대한 것만은 빠짐없이 살폈다.
톨스토이가 외국여행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첫째, 무엇을 가르치면 좋을
것인가. 둘째는 어떻게 가르쳐야만 하는가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기대는 거의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교육 사업에 기울였지만 유럽
각국의 교육 방법은 여전히 그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했다.

「.....유럽 교육학의 대표적인 사람들과 접촉도 해보고 교육 문제에
관하여 씌어진 책과 문서들을 모두 보았지만 나의 여러 가지 의문을
풀어줄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품고 있는 이 의문은 보통

의학과 마찬가지로 교육학도 처음부터 어떤 원리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
그때 톨스토이의 지도를 받고 있는 학교는 열 군데가 넘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있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의 학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학교는 돌로 쌓아올린 2층으로 되어 있다. 두 칸은 교실로 쓰고 또 한

칸은 사무실, 그리고 나머지 두 칸은 교원실로 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의 추녀 밑엔 동그라미의 쇠망울을 잡아매어 늘어뜨린 끄나풀이 달린
자그마한 종을 걸어 놓았고, 현관엔 체조에 필요한 도구들과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놓여 있다. 현관의 어귀와 계단은 눈(雪) 또는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리고 거기엔 시간표가 걸려 있는데 아침 여덟 시만
되면 모든 것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정돈을 잘하며 학교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한 교사가 자기와 함께 지내는 학생 하나를 시켜 종을 치게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먼동이 트기만 하면 일어난다. 학교에선 농가의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등불의 그림자를 바라볼 수가 있다. 종을
울리고 나서 30분쯤 되면은 안개가 잔뜩 끼어 흐릿한 때나 소낙비가 올
때에도 아이들은 언제든지 결석을 하지 않고 몰려든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책이나 수첩 같은 것은 가지고 오지 않는다.
집에서도 그들은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손에 들고 오지
않을 뿐더러 그들은 또한 머리 속에도 무엇하나 넣고 오는 일이 없다.

어제 배운 과목에 대해서 그들은 오늘 아무런 의무도 지니고 있지 않다.
앞으로 배워나갈 수업에 관한 것도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수업 시간이 되기 전에 그들은 수업시간에 관한 것마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설령 지각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아무도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스스로의 결심으로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집안 일이 분주한 까닭에 부모의 지시에

따라 집안 일을 도와주게 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가끔 지각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들은 그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지각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떼엔 반드시 헐떡거리면서라도 학교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사가 출근하기 전에 그들은, 교실의 모퉁이에 있는 계단 근처에
모여들어 계단에서 뛰어 놀거나 교실 안에 모여들어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흥겨웁게 노는 것이다.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추울 때면

그들은 책을 읽기도 하고 물건의 형체를 그려보기도 하며 운동장의
가장자리에서 뛰어 놀기도 한다. 그들은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 학교
생활을 해 나간다.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사귀지 않는다. 남학생이 여학생에 대하여
무엇인가 장난을 하려고 할 때는 여학생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여학생 모두를 상대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 학교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어린 학생들과 어울려 어린
세계에 파묻혀 지냈으나 뜻하지 않게 몸이 약해져 병을 얻었다. 그는
몸이 불편하여 괴로웠으나 앞날에 대한 희망과 포부가 컸었던 만큼 그다지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건강을 하루라도 빨리 회복시켜
보겠다는 생각으로 수양과 치료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1863년 5월
볼가강을 건너 사마라도 갔다.

사마라에서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그때의 생활을 잘 말 해 주고
있다.
「.....이제는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기침은 여전합니다.

우리들은 천막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요즈음 천막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먹기 싫은 마유주(馬乳酒)를 마신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2주일 후 이리야 님의

명절에는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가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한적한 벽촌에 와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것과
잡지의 발행이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게 되어 면목없이 되었다는 것이 제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세루게이와 마샤에관한 모든 소식을 자상하게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데리고 온 학생들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도 함께 동봉합니다.」

톨스토이가 사마라에 있을 때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있는 톨스토이의
집에는 갑자기 수색대가 들이닥쳤다.
톨스토이는 그 당시 [야스나야 폴리야나]란 잡지를 내고 있었는데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여러 가지 국정에 반대하는 비밀 결사의 선전문이
여러 곳에 자주 나붙어 취체 당국에선 이들의 비밀 인쇄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인쇄소에서 인쇄를 해왔지만 밀고한
사람이 농촌에서 비밀 인쇄를 하여 비밀 서류와 함께 나누어 준 사실이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하는 일은 이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톨스토이를 질투하는 자가 밀고를 하였던 것이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나온 헌병과 관리들이 집 안에 들어와서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헌병들은 곳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지도하던 열 일곱 개의 학교도 같은 방법으로 수색 당했다.
수색대원은 샅샅이 뒤졌지만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톨스토이는 「그때 제가 집에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집에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틀림없이
사람을 죽인 죄로 유치장 신세가 되어 있겠죠.」라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 사건의 통지를 받자마자 곧 바로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달려갔다. 그는 이 엄청난 모욕에 분개하여 아 아 톨스타야 백작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사건을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밝혀야만 되겠습니다. 그냥 우물쭈물

넘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행복과 평안을 그리워하며 노력하며
노력해 온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이 여지없이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아주머니는 너무 뜻밖의 일에 놀라 병상에 눕고 말았습니다. .....지방의

순진한 농민들도 저를 정직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죄를 범한 사람, 또는
좋지 못한 사건에 관계된 선동자, 혹은 간사한 꾀를 내어 겨우 취체
당국의 눈을 피해온 돈을 위조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니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신께서 되도록이면 그 일에
관계되는 사람과 직접 상의해 보신 다음 제가 어떤 방법으로 서류를
마련하여 어떻게 이 사실을 황제에게 탄원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알려주십시요. 제가 받은 굴욕과 같은 공적인 명예의 회복을
받거나(사건을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굳게 결심한
바대로 외국에 옮겨갈 수 있는 허가를 얻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깨르세므의 해결 방식은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저는 제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 볼까 합니다. 저는 도망하거나 숨는다는 것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저는 이 고민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또 다시 어떤

일이 저를 괴롭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이 싫어집니다. 차라리
제가 가지고 있는 토지를 전부 처분한 다음 외국으로 떠날까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

그는 헌병대원과 관리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수색하러 오겠다는 말을 적고 나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가 거처하는 방에는 탄약을 넣은 권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일이 그것으로서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
톨스토이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모욕적인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닥친 현실이 얼마나 뼈저린 상처를 주었는지는 이 윗글로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톨스토이는 [참희록]에서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가택 수색을 당한 것에 관해선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1년동안 농사시담국과 학교와 잡지의 경영에 종사하였다. 나는 이
일들로 매우 바빠 몹시 괴로웠었다. .....그 일은 육체적이면 보다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 결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시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광야로 갔다. 그곳에서 신선한 공기와 마유주를
마시면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였다.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결혼을

꿈꾸며 그곳을 떠나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왔었다. .....」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동경하면서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후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상대자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톨스토이는 톨스토이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