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스가 트로이로 돌아온 후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는 왕자의 습관
을 아주 빨리 몸에 익혔는데, 특히 나쁜 점만을 재빨리 배워 나갔다. 늦게
일어나 무위도식하며 예쁜 여자와 멋진 말과 화려한 옷에만 관심을 가졌
다. 부모는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죽이려 했던 잘못을 보상하느라 그를 애
지중지했고, 뛰어난 외모 덕분에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화려한
외양과 친절한 태도 밑에 숨겨진 그의 중대한 결함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
았다. 하지만 그는 게으름뱅이에 거짓말쟁이요 겁쟁이였으며 이 모든 것은
뒷날 밝혀지게 된다. 모두들 파리스가 스물 한살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그
는 스물밖에 안 되었다. 즉 신탁의 예언대로라면 일련의 재난을 나라에 끌
어들이게 될 바로 그 나이였다. 그의 생일날 부친인 프리아모스는 그를 자
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네게 맡길 중대한 임무가 있다. 내가 여러 번 얘기해서 너도 기억 할
테지만. 나의 누이이자 네 고모 되는 헤시오네가 옛날에 헤라클레스에게
납치되어 그리스에 가 있다. 거기서 아마도 어느 왕의 시녀나 부인(당시에
는 시녀나 부인이나 결국 똑같았다)이 되어 여전히 그리스에 살고 있을 것
이다. 그러니 네가 그리스로 가서 고모를 찾아 이곳으로 다시 데려와야겠
다. 고모가 떠나던 날 내가 그러마고 약속했던 대로 말이야." 그리스를 구
경하게 될 기회를 얻어낸 파리스는 몹시 기뻐하며 당장에 짐을 꾸려 배에
올랐고 며칠 뒤 그리스 해변에 발을 디뎠다. 당시의 그리스는 50여 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 각각 왕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스가 정박한 왕국은
스파르타였다. 그곳은 메넬라오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삼십대의 왕이었던
그는 당시에,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좀 멍청하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하지
만 그건 옳지 않은 평가였다. 사실 그는 용감하고 너그럽고 사람들을 잘
대했으며 아주 올곧은 사람이었다. 유일한 그의 결점은 순박하다는 점이
다 하지만 이게 정말로 결점일까? 그 자신이 거짓말하거나 숨기거나 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이나 위선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어디에서도 나쁜 것을 보지 않았고. 모든 사람을 믿었기에 쉽
사리 속곤 했다. 이외에도 2가지 사실을 특별히 언급해야 한다. 하나는 그
가 사냥에 열광적이어서 대개의 중요한 시간을 사냥하는 데 보낸다는 점이
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가 레다와 제우스 사이의 딸인 헬레네라는 사
실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헬레네'로 지칭될 정도로 그리스는 물론 전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통했다. 레다는 헬레네를 낳자마자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인 틴다레오스가 헬레네를 키웠다. 그는 헬레네를 자
기 딸로 믿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뻤던 헬레네는 이미 테세우스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커가면서 그녀는 푸른 눈에 갈색 피부를 가진
비범한 미인이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어
서 얼굴이나 몸매에서 금발의 아프로디테를 부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
다. 게다가 쾌활하고 상냥하고 지적인데다. 부자인 아버지까지 갖고 있었
다. 이러한 온갖 자질을 갖춘 그녀에게 수많은 구혼자가 나타났으리라는
건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그의 부친이 그녀를 결혼시키겠다
고 공고했을 때, 상황을 고려하여 한 나라에서 한 명의 후보자만을 받기로
했는데도 50명이나 되는 왕과 왕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렇게 몰려든 구혼
자들을 보고 틴다레오스는 일견 자부심을 갖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
이 되기도 했다. 헬레네가 선택하게 될 한 사람은 만족하겠지만 나머지 49
명은 불만을 가질 공산이 컸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언젠가 헬레네와 그
남편에 대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50명의 청혼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은 제가 오늘 저녁 마련한 큰 축제에 초대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편을 선택할 사람은 바로 헬레네 자신입니다. 저로서는 헬
레네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
은 서약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축제에 초대할 생각입니다. 즉 '헬레네
의 남편으로 누가 선택되든 언제나 그의 친구가 될 것이며, 그의 권리와
명예를 지켜줄 것이며, 그가 요구한다면 힘과 무기로써 도와줄 것을 엄숙
히 맹세한다' 는 서약입니다."
모두들 자기가 선택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이러한 서약을 어
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 헬레네는 용모가 출중하지도 않고, 돈이 제
일 많지도 않고 가장 용감하지도 않고, 가장 똑똑하지도 않았던 메넬라오
스를 선택했을까? 아마도 그가 누구보다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남
편감으로는 이러한 자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리스가 스파
르타에 도착했을 때는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결혼한 지 벌써 몇 해가 지
난 후였다. 그들 부부는 서로 마음이 잘 맞았고 헤르미오네라는 딸도 하나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행복감으로 충만해 있었고 헬fp네도 불행하지는 않
았다. 다만, 남편을 사랑하긴 했지만 빈번한 사냥으로 자신을 흔자 내버려
두는 게 가끔 불만이었다. 메넬라오스의 잦은 부재로 헬레네는 넓은 궁전
에서 조금은 권태를 느꼈다. 그녀의 유일한 동반자는 딸 헤르미오네와 하
녀들, 그리고 아프로디테처럼 그녀 역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비둘기
뿐이었다. 그곳 주민들로부터 스파르타 왕국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
을 알아낸 파리스는 궁전으로 향했고, 왕과 특히 왕비에게 좋은 인상을 주
고자 했다. 그런 목적으로 그는 아프로디테가 선물했던 마술 혁대를 찼다.
먼저 그를 맞이한 사람은 메넬라오스였다.
"저는 트로이 왕의 아들 파리스로, 30여 년 전부터 그리스에 살고 있다
는 저희 고모 헤시오네를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저의 일에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메넬라오스는 그를 친절히 맞이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도록 하지. 하지만 우선 며칠 여기서 머물게나. 궁전
의 방을 하나 마련해줄 테니 거기 머물도록 하고 내일부터 함께 찾아나서
도록 하세."
파리스는 시간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러한 초대에 선뜻 응하지 않
고 있었는데, 그때 헬레나가 메넬라오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파리스와 그
의 혁대를 바라본 순간 헬레나는 젊은 왕자의 수려한 용모 앞에서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파리스 역시 그녀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1
년 전 이데 산에서 아프로디테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이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 그러한 감정에 빠져 한마디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있
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메넬라오스는 다시금 자신의 초대를
강요했다."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알아듣기 힘들 만큼 빠르게 대답한 파리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사냥이나
헤시오네나 환대의 신성한 규칙 따위가 자리하지 않았다. 오직 그는 헬레
네와 좀더 깊이 사귀어야겠다는 계획만을 즐겁게 세우고 있었다. 뒤이은
나날 동안 파리스는 매일 아침 메넬라오스를 따라 사냥을 갔다. 활솜씨에
뛰어났던 파리스는 갖가지 묘기를 부렸고 그러한 파리스와의 사냥이 몹시
즐거워진 메넬라오스는 하루하루 그의 체류를 연장시켰다. 저녁이면 궁으
로 돌아와 헬레네와 함께 식사를 했다. 낮의 사냥으로 피곤해진 메넬라오
스는 마지막 음식을 삼키기 무섭게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깊고 평화
롭고 원기를 되찾아줄-하지만 경솔한-달콤한 잠에 빠져들기 위해 자기 방
으로 가버렸다. 파리스와 헬레나는 화로 옆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파리스
는 유혹자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당신처럼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 하고
늘 혼자 있게 내버려두는 남편 곁에서 화려한 젊은 날을 허비하고 있다니
참으로 애석하군요! 당신에게는 여행과 축제와 활기찬 대화, 그리고 무엇보
다도 열정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밤낮으로 당신 마음을 사로잡을 그런 남
자가 필요해요."
파리스가 부어준 술과 혀에 발린 칭찬의 말에 게다가 그의 수려한 외모에
정신이 몽롱해진 헬레네는 남편에 대한 정절의 마음이 차츰 사그라들고 있
었다. 어느 날 저녁 파리스는 더욱더 몰아붙였고, 헬레네 는 마침내 유혹에
꺾여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다음날 아침 메넬라오스가 사냥에 가기 위해
파리스를 데리러 왔을 때, 파리스는 몸이 불편한 척하면서 그와 동반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오늘만큼은 흔자 가세요. 저는 궁에서 좀 쉬어야겠어요."
메넬라오스는 의심 없이 혼자 떠났다. 파리스는 즉시 헬레네에게 올라가
그녀를 깨워 말했다.
"난 오늘 트로이로 떠날 거요. 원한다면 당신을 데려가겠소. 거기 가면
당신은 나와 함께 즐겁고 화려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메넬라오스는요?" 헬레네는 주저하며 물었다.
"사실 메넬라오스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는 당신을 치
워버리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걸 오히려 만족스러
워할 거요." "그러면 내 딸 헤르미오네는 어떡해요?"
"그 애 걱정도 할 것 없소. 메넬라오스는 좋은 남편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아버지죠. 그러니 자기 애를 아주 잘 돌볼 거요."
헬레네는 마침내 설득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자기의
옷가지며 개인 용품들 외에도 그녀는 파리스의 요청으로 메넬라오스의 금
고를 열어 물건을 훔쳐냈다. 그리하여 메넬라오스의 황금과 보석 그리고
예술품들을 3개의 궤짝에 쓸어담았다. 서두르는 통에 헬레네는 자신의 애
완 비둘기를 빠뜨리고 말았다. 오후 2시. 하인들과 경비병들이 낮잠 자는
시간을 이용하여 파리스는 마차를 끌어내어 헬레네와 짐들을 싣고 항구로
달렸고, 정박해 있던 자신의 배에 올라 돛을 모두 올리고는 트로이로 향했
다. 밤이 되자 메넬라오스는 만족스러운 한나절을 보낸 뒤 궁으로 돌아 왔
다. 그는 즐거운 기분으로 헬레네의 방으로 올라갔으나. 방에는 비둘기와
파리스가 남기고 간 조롱 섞인 글귀만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사냥 나
간 자는 자기 자리를 잃게 마련'이라고 적혀 있었다.
'神話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트로이 도착 (0) | 2012.11.27 |
---|---|
전쟁의 준비 (0) | 2012.11.27 |
파러스의 판결 (0) | 2012.11.27 |
파리스의 탄생과 유년 시절 (0) | 2012.11.27 |
트로이 성벽의 구축 (0) | 2012.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