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12월 20일

별관신사 2015. 1. 23. 02:23

신명기 5:25-30. 인생의 실로 가지각색인 불행은 다만 인위적으로 은폐되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같은 온갖 불행에 대하여 신명기의 위의 말씀과 그에
있단 제 6장-제 11장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보다도 더 명확한 구원의 약속을

바랄수는 없다. 그러나 이 약속이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며 적절한가 어떤가,
그것은 당신 스스로 시험해 볼 수가 있다. 단 그것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조건부로 약속받았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그 조건대로 시험해

보아야만 하듯이, 신의 약속을 시험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신은
결코 조건 엄수라는 것을 꼼꼼장이가 까다롭게 따지는 만큼은 엄히 따지지
않으심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마음이 항상 성실할 경우에만

그러할 것이다. 그러하되 물론 완전한 축복은 이들 태고적 말씀에 따라서
어디까지나 선행을 한 결과로서만 주어진다. 즉 그러한 신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이미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자 했을 때, 그

전보다도 행복한 생활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늘날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그 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니다. 그밖의 길로는 오늘날의 세상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세상의 일반적 생각에 따랐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 생각에
대하여 이미 구약성서에 그와 반대되는 명백한 증거가 누누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범위로는 이 증거가 여지껏 그 누구도 속인 일이 없다.

적어도 우리는, 꽤 오랜 기간의 인생 경험에 입각하여(어중되고 무기력한
일시적인 시도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나는 확실히 속았노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다. 이에 반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는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인생의 행복을 뿌리채 잃은 사람들의 수는 지금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말라기 3:13-20.
이미 구약에 있어서 유태 백성에 대하여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었던 것일까. 또 우리가 오늘날 (구약시대보다도)
더욱 나쁜 사태에 놓여져야만 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구세주>가
우리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신약성서는 이들 옛날 약속을 보다 내면적으로,

보다 깊게 이해했을 뿐이며 그것을 버린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5:17-20.

기적의 신앙
신의 나라에 이르기를 원하고
그 영광스런 구원을 보고픈 사람은,
이 속세의 정신을 경시하고
신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기특하게도 구원의 부름받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은 오직 기적일 따름.
어둠에서 빛에 이르는 길은
모든 단계가 불가사의로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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